비오라트의 번역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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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02월 03일 09시 17분 00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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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ncode.syosetu.com/n7769bh/69/

     

     

     

     아포카리스페.

     옛날 VR여명기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MMORTS.

     인기는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 전투 시스템은 여러 작품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세련되어 있었다.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것은, 평소엔 들여다 볼 뿐인 맵이다.

     넓은 범위를 보여주는 헥스맵과, 가까운 범위를 보여주는 광역 맵.

     평상시에는 대부분 쳐다보는 용도로 쓰지만, 이 기능이 진가를 발휘할 때는 전쟁 시.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 다.

     카론이 선전포고를 승인함과 동시에, 반투명한 윈도우 맵 주변에 몇 가지 기능이 전개된다.

     트리 형태로 간략화한 아군과 적군의 유닛 정보. 작전의 지시를 하기 위한 커맨드 버튼.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행동 로그. 맵 위의 푸른 점인 아군의 유닛 머리 위에는 역할을 나타내는 부호.

     태블릿처럼 눕혀진 넓은 광역 맵에다 손가락을 휘저으며 아군 전체를 원으로 둘러싸서 진행루트를 화살표로 가리키니, 에레미야와 그라도라의 군이 윈도우 안에서 진군을 시작했다.

     고양이 수인부대의 일부를 다른 원으로 그리고, 크게 우회하여 적 측면을 공략하도록 화살표를 그리자, 직진하는 군에서 떨어져 이동한다.

     핀치아웃으로 맵을 확대한 후 한 마리를 탭하여 고르고, 행동방침을 선택하면 단독으로 행동을 개시한다.

     후방의 마술부대를 원으로 묶어서, 전선부대와 결부시켜서 지원의 커맨드를 선택하면,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는 마술이 빛이 되어 날아간다.

     모든 것을 생각하는 대로, 먼 땅에서 말을 해주지 않아도 병사들을 움직이는 힘.

     이것은 병기 연습에 가까운 시스템이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리얼타임으로 발생하고, 연산할 필요도 없이 대답을 결과로서 얻게 된다.

     왕이 혼자 먼 곳에서 싸움을 장악하는 모습은, 근대적인 전쟁과 비슷한 점도 많다.

     아니.

     원격조작의 기분으로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양심을 찌르는 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게는 안된다.

     자신의 수완에 의해 잃어가는 목숨이, 자신의 눈으로 살아있는 모습을 보아왔던 마물들이, 화면 저편에서 전장을 누비는 모습이 보이고 만다.

     

     "........"

     

     생각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말해주면서, 카론은 궁전의 옥좌 앞에 서서,ㅗ조금 피곤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윈도우의 조작에 집중하였다.

     마환장군을 자칭하는 [키마이라] 그웬타를 할드로기아가 타도한 것으로 인해, 사르탄의 국내에서는 위협이 사라졌다.

     그 위업을 찬양하는 것처럼, 사르탄 왕 하자르는 카론을 국빈으로서 정식으로 모셔들이고, 순종을 뜻하려는 듯 옥좌를 내주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방의 왕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두려움을 표하는 하자르의 행동에 가신들은 반감을 품었지만, 그것은 처음 뿐으로 끝났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궁중의 모두가 어렴풋이 그웬타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고, 그가 제국의 비장의 수인 스콜라를 수중에 넣었다는 것과, 하자르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걸 구출한 인물이며, 궁전을 두르는 강력한 결계를 일격에 파괴해 버렸으며, 마왕군의 정예를 물리친 집단의 장이니, 지금은 섣불리 건드리는 걸 꺼려할 뿐이었다.

     하자르가 스스로 옥좌를 넘겨준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마왕을 넘어서는 존재의 앞에서는 할 수 없었다.

     

     "에스텔드 바로니아 왕께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자르와 나란히 무릎을 꿇은 이리셰나가 쭈뼛쭈뼛 물어보니, 대답은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카론이 아닌, 옆에 선 장신의 [키메라] 로이엔타레가 해주었다.

     

     "조용히. 카론님께선 신과도 같은 비술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부디 방해하지 마시길."

     "비술?"

     "예. 우리들 에스텔드 바로니아를 인도해 주시는, 말없는 호령. 위대한 왕의 기적. 지금 카론님은 왕국으로 다가오는 어리석은 자들을 배제하는 일에 주력하고 계십니다."

     

     카론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면서, 아직 눈을 뜨지 않는 용자를 감시하는 할드로기아를 대신해 자리를 맡고 있는 로이엔타레는, 단순한 인간에게 자랑하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듣는 쪽은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카론 이외의 눈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손으로 긋거나 원을 그리거나 하는 등 기묘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고, 그런 대단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 왕의 전투에 거리는 관계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설령 세계의 끝이라고 해도. 먼 저편에 원정 간 우리들 종복에게도, 그 말씀은 널리 닿습니다. 뭐, 인간에게는.......그 마왕군조차도 이해는 못하겠군요. 어쨌든, 부디 방해하지 말아주시길."

     

     로이엔타레를 포함한 키메라들은 진지한 얼굴로 카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분위기는 다른 개입을 용서치 않는 듯한 엄숙한 면이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에스텔드 바로니아의 전쟁은 이 세계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인가.

     작업에 몰두하는 에스텔드 바로니아 왕의, 긴 앞머리 사이에서 비치는 흑자색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하자르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하나 확신한 것은, 이 세계의 인간과 이방의 주민들의 사이에는 결코 나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크흠."

     

     잠깐 기침을 하고, 카론은 주위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맵을 주시하고 있었다.

     들볶는 것처럼 예민한 얼굴이, 부딪히려 하는 두 군대의 정보를 재빠르게 정리하고, 최적의 형태가 되도록 병사의 움직임을 손끝으로 조절하면서, 문득 신경쓰였던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마물들은,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왕이면서도 지휘관을 짊어지는 카론에게서 보내지는 각종 지시.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왜 그런 건지는 전혀 모른다.

     그걸 카론이 묻기에는 입장 상 주저되지만, 지금에 와서 문득 신경쓰였다.

     

     

     그 대답은, 정말 단순한 것이었다.

     초원을 달리는 정예들은, 카론에게서 보내지는 세세한 지시에 따라서 막힘없이 대열을 짰다.

     동료의 사이를 누비고 나아가는 움직임을 갑자기 요구받아도, 호흡이 맞는 콤비네이션으로 별일 없이 해낸다.

     로이엔타레가 말없는 호령이라고 표현했던 것의 정체는, 그들의 시야에 떠오르는 몇 가지의 화살표와 문자였다.

     누가 어디에, 언제 어떻게.

     부대를 이끄는 대장이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에스텔드 바로니아의 병사들 안에서 공유된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뭉유병처럼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은 그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림과 문자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강인하면서 왕에게 최상의 충성을 바치는 자들은, 확실히 그곳에 있는 왕의 의지야말로 우리들을 인도해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군을 한 명 잃은 정도로 통솔이 흐트러지고, 그냥 부딪히는 것 밖에 못하는 마왕군으로서는, 각오가 다른 것이다.

     

     "자! 가자가자가자가자~!"

     

     열기에 찬 에레미야의 목소리에 호응하여, 용맹스런 포효가 일어났다.

     이 세계에서 살고 있어도 눈으로 본 일이 없는 듯한 각종 괴물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온다.

     의기양양하게 전투를 갈구하는 에스텔드 바로니아의 병사들.

     그에 지지 않겠다며, 마왕의 부하들도 포효를 하였다.

     문드러진 골렘과 외눈 거인, 팔백 다리의 지네와 세 머리의 괴조같은 거대한 마물과, 가시 갑옷을 입은 리저드맨과 큰 방패를 멘 오크, 산양 뿔을 한 데몬과 독연기를 내뿜는 트렌트 등도 있었다.

     그 수는 대략 오백. 이 대륙을 손에 넣기 위해 마왕이 얼마나 진심을 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각양각색의 마물이 늘어서 있는 광경은 압권이었으며, 보기로만 따지면 에스텔드 바로니아보다 박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마물과 전쟁하는 경험이 없었던 자의 시각이었고, 익숙한 자들이 보기엔 긁어모은 집단으로만 보였다.

     

     "마왕 따위 뭐 별 거 있겠어! 우리 제 2단이 선봉창의 영예를 가져간다!"

     "통제도 되어있지 않은 상대다! 전공이 필요하면 정면의 적을 해치우면 돼! 훈련보다 간단하다고!"

     "제 2단에 뒤처지지 마라! 우리들 제 5단! 신속 에레미야의 병사임에 부끄럽지 않을 속도로 죽여라!"

     "에스텔드 바로니아의 행차시다! 죽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죽어!"

     

     그리고, 드디어 양군이 부딪혔다.

     에스텔드 바로니아가 이 세계에서 전쟁을 한 것은 두 번.

     첫 번째는 신도 딜아젤. 두 번째는 라돌 공국.

     신도에서는 군단장들의 활약으로 유린했었고, 공국 때는 저레벨의 병사로 모범적인 공격을 하였다.

     어느 쪽도 에스텔드 바로니아에게는 진심을 다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전개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투입된 정예, 이백.

     철저한 강화마술에 의한 원호와, 진지한 마음가짐에 들어간 카론의 지휘.

     용서도 없고 가감도 없다. 놀이도 없고 방심도 없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수인들에 의해 단칼에 베어지는 마왕군의 구도였다.

     선혈을 뒤집어 쓰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에스텔드 바로니아 군의 앞에 시체의 길이 이어졌다.

     칼을 맞대는 소리도 없이, 몇 합 겨룬 후에는 살을 찢는 소리와 단말마가 울렸다.

     개개인의 전법은 정해지지 않아서 스스로의 능력에 맡긴다는 야만스러움이 돋보이는 수인부대였지만, 대열은 한 치도 흐트러질 기미는 없엇다.

     물리에 높은 내성을 가진 적은, 마술부대가 왕의 지시에 따라 최적의 속성의 마술로 우선적으로 죽였다.

     회복을 주로 쓰는 적은, 궁병이 지정된 포인트를 노려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죽였다.

     모습을 지우려고 해도, 조사마술로 드러난 순간 유격병에 의해 즉시 죽였다.

     측면을 치려고 움직여도, 그보다 빨리 움직였던 별동대의 거수가 주저없이 죽였다.

     하지만, 마왕군도 그냥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칼로 내리치는 홉고블린이 있었고, 중위의 마술로 상대의 팔을 꿰뚫은 아크데몬도 있었다.

     이제까지와 비하면 상대도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스테이터스 만으로 판단한다면 미미한 대미지밖에 안 된다.

     무엇보다, 에스텔드 바로니아의 병사들은 상처를 아무리 입어도 결코 겁먹지 않았다.

     눈앞의 적을 죽이라고 명받았다. 그에 따를 뿐이다.

     그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충성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왕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

     무엇인지 몰라도, 어디인지 몰라도, 왕의 의지에 거스르는 자는 없다.

     단순한 무리로선, 이 강인한 마물의 군대에 저항할 수 없다.

     먼 옛날 세계를 위협했던 지옥의 사자들은, 그 맹위를 떨치는 일 없이 구시대의 산물로 전락하려 하고 있었다.

     

     

     "이걸로 끝나나?"

     

     먼 사르탄의 궁전에서, 카론은 중얼거렸다.

     

     "녀석들이......마왕이 뒤에서 공국과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면, 이건 너무 약해."

     

     마왕군은 나름대로의 수가 있었다.

     라돌 공국의 반란이 성공하든지 안하든지, 리페리스 왕국을 함락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 생각이 벗어난 이상 무언가의 대책을 세웠을 거라고 카론은 생각하였다.

     일부러 정예를 보냈는데, 이래서는 이전의 저레벨 부대여도 이길 정도의 전투 밖에 안되었다.

     장군이 세 마리나 죽은 것도 모르는 건지. 정보의 전달이 불충분한지. 그냥 그냥 계획의 요체를 달성하려고 하는 것 뿐인지.

     맵 상에서는 멈추지 않고 괴멸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떨어진 지점에서는 아직도 전이의 문이 존재한 채인 것이 아무래도 신경쓰였다.

     

     "카론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로이엔타레, 코드홀더와 연락이 취해지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예, 문제없습니다. 명령대로, 이쪽에 나타난 문을 감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는 있는가."

     ".....아니요, 열 몇의 마물이 나오는 정도입니다."

     "그런가."

     

     오른손으로 콘솔을 조작한 채, 왼손으로 볼을 긁는 카론은, 로이엔타레의 대답에 다시 생각했다.

     

     '그 레벨과 랭크의 마물을 장군 취급했다는 말은, 사실은 정말 약하다는 뜻인가? 아니..... '그건 버림패겠지'."

     

     카론이 보면 어느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금 공격해오는 마왕군은 리페리스 기준이라면 절망적인 상대다.

     그거라면 내부공작 같이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군을 보내면 끝난다.

     사르탄도 그렇다. 제국의 비장의 수인 용자를 수중에 넣었으니,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바로 점령해도 되었을 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못하는 건가, 하지 않는 건가.'

     

     못한다고 하면 거기까지지만, 만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전력을 숨겨두고 싶었다?'

     

     해답은, 리페리스의 전이문에서 나타났다.

     

     "읏, 하하!"

     

     그 존재를 표시하는 파라미터를 보고, 카론은 경악과 함께 무심코 미소를 띄웠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그대로 놔두며, 으드득 하고 이를 깨물어 어금니가 소리를 내었다.

     

     "꽤 하는군.....!"

     

     

     

     

     커다란 피해도 없이, 마왕군의 수를 절반 정도까지 줄인 에스텔드 바로니아의 병사들에게, 방어태세의 명령이 내려졌다.

     확실한 승리가 눈앞인데 어째서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기분과는 별개로, 왕명에 복종하는 병사들은 즉시 단단한 방어계의 마술과 스킬을 행사하여, 전투의 손길을 멈추고 자세를 잡았다.

     갑자기 공세를 그만두고 방패와 결계 안에 웅크린 광경에, 마왕군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호기로 보고 가열차게 공격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먼 후방에서 찾아온 모래폭풍에 삼켜지자, 조각나면서 절명하였다.

     모래폭풍은 마치 포격처럼 모든 것이 보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태양빛을 받아서 일곱 색으로 빛나면서 전장을 관통하여 왕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계속 움직이지 않고 있던 왕국기사단의 앞으로 이동한 거수의 무리가 벽이 되자, 직진하는 무지개의 광석은 살아있는 벽에 가로막혀 흩뿌려지며 반짝거리는 빛을 내었다.

     

     "퉷퉷.......뭐야 이거~"

     

     카론의 지시 덕분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직격을 맞은 중앙의 부대는 완전히 버티지 못한 자들이 나왔고, 그들은 보석의 폭풍에 몸이 깎여나가는 바람에 출혈이 일어났다.

     그 중앙부대에 섞여있던 에레미야는 부하 덕분에 상처가 없었지만, 팔로 입가를 가려도 들어오는 모래의 불쾌함에 침을 뱉으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수상쩍게 서 있는 지옥의 문.

     그걸 열고 있던 것은, 보석의 비늘을 가진 큰 뱀이었다.

     드래곤과 같은 험악한 얼굴을 가진 큰 뱀은, 거인의 키보다도 큰 몸통을 비비 꼬면서 강제로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와도 나와도 끝이 없었고, 에레미야의 앞까지 머리를 펴도, 아직 꼬리는 나오지 않은 채 전이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무지개의 비늘을 가진 지룡.

     세계를 감싸는 큰 뱀.

     랭크 10.

     마수종.

     

     ㅡㅡ세계뱀 [미드갈즈오르무].

     

     울지 않아도 대기가 떨고, 움직이지 않아도 세계가 진동한다.

     똬리를 틀면서 높게 높게, 태양을 가릴 정도로 높게 고개를 치켜든 모습은, 세계의 파멸을 알리는 재앙에 아울리는 신성함과 불길함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세계에서 태어난 생명으로선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현현하였다.

     인간 따위는 티끌로만 보이고, 마물 조차도 길거리의 돌멩이 정도로 생각하는 종말의 화신.

     이 세계에 생을 부여받은 자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천상의 괴물에, 누구나 쥐처럼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세계뱀 미드갈즈오르무가 비틀듯이 몸을 부르르 떨자, 몸에 붙어있던 보석이 떨어져 나와서 지면에 파고들었다.

     한 장 한 장이 3미터 정도가 되는 거대한 무지개빛 비늘.

     그것은 미드갈즈오르무의 마력을 담고 있었는데, 박박 돌을 문지르는 소리를 내면서 형태를 바꿔나가, 손발이 돋아난 보석의 덩어리같은 마물로 진화하였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마력에 의해 뱀의 의사에 맞추어 움직일 뿐인 유사 생명이었지만, 그럼에도 생명을 만들어 냈다.

     떨어지는 거대한 비늘에서 태어나는 [쥬얼 골렘] 은, 같은 마왕군의 마물도 짓누르면서 수를 늘려나갔다.

     이것이 신에 속하는 존재의 힘, 《옥명창생》.

     마력이 다할 때까지 꼭두각시를 만들어내는 이 스킬을 멈추지 않으면, 레스티아 대륙은 금세 골렘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 재앙에 맞서는 것은, 신에게 사랑받는 구세의 영웅인가.

     아니면ㅡㅡ

     

     "우엑."

     

     커다란 존재를 눈 앞에 두어서인지, 에레미야는 벌레씹은 듯한 얼굴로 성가시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봐도 전기는 통할 것 같지 않은데요~. 아아~ 개가 오기 전에 또 한번 활약하고 싶었는데~"

     "자, 잠깐 에레미야님. 지금은 조용히 해주세요."

     

     갑자기, 얼굴의 반절의 피부가 벗겨진 호랑이 수인이 서둘러 다가와서 귓말을 하였다.

     

     "어째서?"

     "지금 노려지게 되면 힘드니까요."

     "......어째서 피하지 않은 거야?"

     "당신을 지키려고 방패가 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쉿~, 조용히 하지 않으면~"

     "이, 이 사람 진짜......!"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에서 소란을 피우는 무언가를 눈치챈 미드갈즈오르무는 고개를 향했다.

     자기 앞에서, 약한 생명이 소리를 내는 걸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그 사안에 쐬여지는 것만으로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목소리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상처입은 자도 무사한자도 점점 일어서며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에레미야님은 우리를 계산에 넣지 않네."

     "그라도라님 빨리 오지 않으려나....."

     "남의 단장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너희들의 단장이잖아."

     "회복부대~, 일해라~, 나 눈 맞았다고~"

     "뭐? 침이라도 발라두면 낫지 않을까요?"

     "뭐어어......."

     "후퇴 지시는 없는가."

     "기쁜 이야기잖아. 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목소리는 늘어만 간다.

     절망과는 무관계한 자들이 이를 드러낸다.

     

     "히히, 이것 참 안 됐네~. 우리들은, 에스텔드 바로니아는, '신 정도로는 놀라지 않는단 말야'."

     

     왜냐면, 하고 가슴을 편채 선언한 에레미야가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방패로 삼는 바람에 상처입은 거수들의 안에서 나와서 천천히 걷고 있는 자그마한 인영.

     네 뿔과 이형의 팔을 가진 소년의 그림자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거품처럼 확장되어갔다.

     볼 때마다 그 모습은 산보다 높게 치솟았고, 소의 몸과 사지를 가진 이팔사각의 괴수는, 비취색 몸을 융기시키며 갑자기 크고 날카로운 환희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여덟 용을 잡아먹고 신으로 도달한 짐승.

     미드갈즈오르무가 처음으로 만나는 동격의 짐승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났다.

     종말이라고, 어딘가에서 인간의 아이가 중얼거렸다.

     반면, 미드갈즈오르무를 올려다보는 에레미야가 중얼거렸다.

     

     "제 2라운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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