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밀을 수확하고, 겨울을 지나 다시 씨를 뿌리는 봄이 오기까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전에 에르네스트 님을 배웅해야지."
후작령에서 왕도까지는 마차로 2주. 긴 여정이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아내이니 웃으면서 보내주자.
외투를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가니, 복도에 금빛 털을 가진 큰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온화한 표정과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기억 속의 그와 닮았다.
"ㅡㅡ너는 그때 강아지였니?"
개는 작게 짖고서 비올레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비올레타는 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으로 나가자 지금 막 출발하려는 에르네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호위병과 시종, 집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무리 속에서도 에르네스트의 모습은 유난히 빛나 보였다.
(역시 아름다운 분이셔)
비올레타는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어제 그런 말을 들었으니, 멀리서 배웅만 하기로 했다.
싫어하는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불쾌할 테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미움받는 것은 조금 슬프네)
그때 에르네스트가 비올레타 쪽으로 걸어온다.
뭔가 잊어버린 물건이 있는 걸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금 옆으로 비켜서려고 했지만, 에르네스트의 눈은 비올레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일 틈도 없이,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세가 된다.
비올레타는 당황했다.
이번엔 무슨 말을 들을까 싶어 무심코 몸을 움츠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 어제는 미안했다."
작지만 귓가를 울리는 사과에 비올레타는 깜짝 놀랐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아뇨,...... 신경 쓰지 않아요. 다녀오세요, 서방님."
"......그래."
그렇게 말하고, 에르네스트는 비올레타에게 등을 돌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비올레타는 출발하여 멀어져 가는 일행의 그림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님, 이제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집사 세바스찬이 말을 건넨다.
"그래요......."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하늘에 검은 점이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 점은 엄청난 속도로 점점 커져만 간다.
그 존재를 알아차린 하인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검은 새ㅡㅡ나이트 레이븐이 비올레타를 향해 곧장 다가온다.
"부인, 빨리 집 안으로ㅡㅡ!"
"쿠로!"
"...... 쿠, 쿠로?"
틀림없다.
그 실루엣, 그 눈동자, 그 얼굴.
당황하는 세바스찬의 옆을 지나, 비올레타가 쿠로를 향해 달려간다.
쿠로는 유유히 땅에 착지하고 동그란 눈으로 비올레타를 바라본다.
비올레타는 기뻐하며 검은색 목을 끌어안았다.
"나를 쫓아와 주었어? 정말 착한 아이구나! ......어머? 안장에 뭔가 ......"
비올레타 전용 안장에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ㅡㅡ쿠로가 가고 싶다고 하니 보내준다.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 짧은 편지.
편지의 주인은 오스카임에 틀림없다.
(고마워요, 오빠)
오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쿠로의 털을 쓰다듬어 준다.
쿠로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비올레타의 자유의 날개다.
저택을 돌아본다.
집사 세바스찬과 하인들이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겁에 질려있거나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나의 나이트크로우ㅡㅡ쿠로랍니다. 아주 똑똑하고 착한 아이이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술렁거림이 일어난다.
아무래도 이 땅의 사람들은 나이트크로우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세바스찬. 서방님께서 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나요?"
"ㅡㅡ저, 전부 마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ㅡㅡ에르네스트는 비올레타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자유롭게 있어도 된다는.
비올레타는 활짝 웃었다.
"그럼 먼저 흙벌레가 많이 있는 곳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쿠로에게 포상을 주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