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왕2021년 01월 20일 03시 36분 50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작성자: 비오라트728x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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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의식 저편에서 우는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
서둘러 내달리는 흙의 진동. 쏘아진 마술의 여파에 떨리는 마력의 파동. 흔들흔들 떨리는 감각.
격심한 공중폭격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이겼는지 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탁한 시야의 어둠이 흔들리더니, 이 납덩이같은 무게에서 도망치게 하려고 말을 건다.
"ㅡㅡ님! ㅡㅡ일님!"
귀를 스치는 목소리가 뇌에 닿아도, 일어서고 싶다고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둔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보좌로 붙은 제자의 것이라면 응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의식이 떠올랐다.
"큭, 쿨럭!"
폐의 공기가 단번에 빠져나왔는데, 기침을 한 입 안에서 쇠의 맛이 났다.
몽롱한 의식의 바레일이 시선만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옆에 주저앉아서 얼굴을 들여다보는 부하와, 그의 뒷편에 쓰러져서 괴로운 듯 발버둥치는 제자들이 보였다.
그 옆에는 부상자를 지키려고 대열을 짠 마술사들이 마법진을 짜내어 전선을 호위하려고 필사적으로 빛의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겹쳐진 다리의 사이에서 보이는 전장은 더욱 처참했다.
폭탄은 마물들도 같이 날려버렸지만, 사체에는 적도 아군도 없었기 때문에, 경상으로 끝난 마물이 무차별적으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어느 만큼의 폭탄이 떨어트린 건지, 이쪽저쪽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의 빛에는 선물의 위력을 이야기해주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쿨럭......젠장맞을."
"괜찮습니까? 손을ㅡㅡ"
"괜찮아. 늙은이 취급하지 않아도 돼."
점점 자신이 놓여진 상황을 파악해가는 바레일은, 위를 향해 누웠던 몸을 엎드리게 하고서 완만한 움직임으로 일어서며,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분한 듯이 먼 공국을 노려보았다.
찰나의 판단으로 방어마법을 쓰기는 했지만, 물리폭파내성이 없는 것이어서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한 사람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회복마술을 배운 자는 있기 때문이다.
"상황은, 어떻게 되었지."
"마조의 습격에서 30분 지났습니다. 마술부대는.......보시는 대로입니다.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요."
"그런가."
"그 습격 이후로 계속 하늘을 돌아다닐 뿐이고 습격하지 않는 건 다행입니다."
꽤 긴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저쪽은......"
부하가 향한 시선의 끝은 주 전장과 또 한 곳.
회복술사를 배치했던 지점도 노려진 모양이어서, 쓰러진 동료를 치료하는 희뿌연 녹색 빛이 나오고 있다.
저래서는 동료끼리 해주기에 급급하여 병사의 치료는 만족스레 할 수 없겠다고 보는 편이 좋아보였다.
가령 전선의 치료에 나섰다고 해도, 언 발에 오줌누기. 그 만큼의 피해가 펼쳐져 있다.
이곳저곳으로 도망치다가, 뒤를 따라잡혀서 깔려버린 모습도 보였다.
"경계하고 있어도 막을 수는 없겠지. 저 정도의 위력과 수라면 전부 대응할 수 없어."
"한탄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발치를 보니 믿고 있었던 묘약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몸을 굽혀서 주운 것은 폭풍을 면한 두 병 뿐.
감시하는 듯이 날아다니는 마조를 보면서, 바레일은 백발을 헝클어뜨리며 마술을 발동하였다.
"당했다면 갚아주라고 가르쳤잖아! 타종하라 화염의 만종. 하늘에 걸린 관을 울려 대륜의 광폭을 피워내라!"
세 갈래의 끝에서 떠오른 홍옥은 고도를 올렸고, 마조의 눈앞까지 온 순간 파문과도 같은 마법진이 펼쳐졌다.
매직스킬 :화 《임팩트 펄스》
넓혀진 마법진은 하늘을 연쇄된 구형의 폭염으로 불태워버린다.
떨어진 폭탄보다도 훨씬 위력이 높은 고위마법의 발동에 약간 숨이 찼지만, 얼버무리듯이 입을 닦으며 혀를 찼다.
"에에이, 이걸로 전부 죽지 않은 게 더 화가 나는 구만."
아마도 저것이 대공의 눈이다.
강 건너 불구경을 하면서, 모습을 보이지도 않은 채 유유히 이 참상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300이 넘는 마물을 동시에 사역하다니 용자의 범주를 초월한 능력이다. 확실히 보통사람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오면 당최 용자라고도 부를 수 없다.
용자와 대극을 담당하는 존재와 너무나도 비슷하다.
"이거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르겠구나. 인마대전의 재래가."
지팡이를 몇 번 회전시키며 몸을 끌어안듯이 지팡이를 들고 영창을 하니, 하늘에 다시금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매직스킬 :화 《아그니 라인》
지정한 목표는 적진의 후방.
지팡이를 정면으로 들자, 가장 성가신 마물이 밀집한 지점을 작열의 광선이 가로를 그리며 쏘아졌다.
벽처럼 연이어 분출하는 불기둥이 많은 마물을 죽음으로 이끌었지만, 역시 모두라고는 할 수 없었고 그을린 몸을 상관하지 않는 화염의 거인은 뜨거운 숨을 내쉬면서 진격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남아있던 것 중의 한 병을 열고 쭈욱 들이킨 후, 바레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였다.
느긋하게 있어도 될 상황은 결코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다.
해답은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물어볼까 하고 가볍게 지팡이를 흔들어서 통신마술을 기동시켰다.
"어이, 듣고 있어. 살아있다면 대답하지 못할까 강검 도그마."
[......아, 듣고 있습니다.]
대답에는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확실한 어조를 듣고 눈치채이지 않을 정도로만 안심하였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런데 그쪽은 어때. 본인 쪽에서도 대강은 보이고 있지만."
[그럼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웃!]
중앙 부근에서 피분수가 높게 치솟았다.
[바레일 공,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요. 여긴 이제 틀렸습니다.]
힘들여 냉정을 가장하고 있어도, 분노와 안타까움이 통신마술을 통해서도 전해져 온다.
포기한 것처럼 들리는 도그마의 말이었지만, 바레일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신음을 내고 말았다.
그 판단이 맞는지는 누구도 답을 해줄 수 없다.
다만.
아무리 패전의 기미가 짙어졌다 해도, 그들은 용자로서 해내야 할 승리를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갑시다. 공국으로.]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을 버리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도그마도 알고 있으면서 말한다는 것은 떨리는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용자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용자에게만 가능한 결단이 있다.
".......어쩔 수 없지. 그게 용자라는 것이야."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본 보좌의 남자의 얼굴이 불안으로 어두워진다.
도그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바레일이 무얼 하려는지 눈치챈 남자는,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얼굴을 들었다.
"무운을."
피곤에 지친 얼굴의 바레일에게 향하는 결의의 표정.
그걸 보면, 우수에 찬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정말이지. 첼미도 그렇고 내 주변에는 이런 녀석들만 있구만."
둥글게 말았던 등을 펴고, 평소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강검! 말 붙잡아서 데리러 와!"
[알겠습니다. 이깁시다, 반드시!]
통신이 두절되자 바레일에게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유치한 말 하기는."
용자는 시스템이다.
영웅담과 무용전이 아무리 사랑받고 있다 해도, 그 안에서 활약하는 모습의 안에는 많은 고뇌가 숨겨져 있다.
그 괴로움을 알고 있는 입장으로선, 언제까지나 유치하게 지내는 도그마의 삶의 방식이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약간 동경하는 부분이 있었다.
"뭐 좋아. 알마스! 어쨌든 제공권을 되돌리는 일을 우선해! 그 후엔 부상자를 모아서 회복술사에게 치료하도록 하고!"
"예!"
"어쨌든 도그마와 내가 공국을 함락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어두면 돼! 이 이상은 원하ㅡㅡ......뭐야?"
불탄 로브의 옷자락 사이로, 피렌츠의 숲에서 튀어나온 무언가를 보고 눈을 가늘게 하였다.
질주하는 것은, 푸른빛을 띈 검은 털의 군마다.
홍옥의 눈동자를 움직이며, 콧김을 내뿜으며 어지러진 대지를 박차며 바레일을 향해 일직선으로 향해온다.
"보였다!"
그 위에 탄 미라・사이파가 외치자, 뒤를 이어 벨트로이, 리발, 그리고 벨트로이의 등을 붙잡고 있는 필미리아가 알았다고 하였다.
에스텔드 바로니아에서 빌린 이 '묵왕준마・절지' 는 다른 기마보다도 훨씬 빠르고 우수했다.
흙에 발이 닿는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평지를 내달리고 숲을 건너, 예상보다 빠르게 전장까지 옮겨다 주었다.
미라는 경계하고 있는 왕국군에게 자신의 증표인 은의 장검을 들어보이며 고삐를 당겨 후방을 내달렸다.
" '큰불' 바레일・오더! 아직 죽지 않았나!"
새로운 적인가 하여 경계하던 마술사들이었지만, 거기에 있던 기사가 유명한 사이파 가문의 여식이라는 걸 알고서 동요를 보였다.
바레일도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유격부대가 멋진 말을 손에 넣어서 나타났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리고, 미라 일행의 얼굴은 생기에 차있었다.
"사이파 가문의 딸인가! 머리가 녹아버리진 않은 모양이구만!"
"문제없다. 여러가지로 대화하고 싶은 건 있지만, 그럴 시간은 없어보이는 구나."
"음. 본인은 강검과 같이 공국으로 쳐들어간다. 우리들이 대공을 토벌할 때까지 전선을 힘껏 유지해줬으면 한다만!"
"그럼 좋은 소식이다. 원군이 올 거다. 사정이 있는 원군이지만."
"........뭐?"
어찌되었든 우군이라니 마음 든든하다며, 바레일은 쓸데없는 일은 묻지 않고서 "잘 했다!" 라고 명랑한 목소리로 미라에게 말하고 등을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 불안을 느낀 리발이 보충하려고 입을 열려 했지만, 옆에서 뻗어온 검의 휘황찬란함에 소리를 다시 삼켜버렸다.
"조용히 있어."
정말로 전하지 않아도 되는지 시선으로 묻는 리발이었지만, 슬쩍 곁눈질을 보낸 것 만으로도 조용해졌다.
"리발 씨는 그다지 기가 센 분이 아니었나요......?"
"아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미라 대장이 상대이니 그렇겠지."
연애의 감정에 둔한 그로서는 그 정도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큭, 시끄럽다 거기!"
"네놈도 가만히 있어. 그래서, 계획은 있는 건가."
"여유롭구만 너희들.....뭐 어떻게든 된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녀석의 능력을 본인 정도로 잘 아는 자도 없을 테니."
"그건.....아, 그렇군. 하지만 그 무렵과는 꽤 달라졌을 텐데? 난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들은 기억이 없다."
"음, 본인도 그래. 하지만 어떻게든 될 거야. 왜냐면 본인은ㅡㅡ"
"바레일 공!"
격한 말발굽의 소리와 낮은 목소리.
돌아보니 도그마가 군마를 이끌고 바로 옆까지 달려왔다.
"왜냐면 본인은 천재니까!"
손을 뻗어서 도그마의 등에 올라탄 바레일은 흰 이빨을 드러내었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그걸 납득시킬만한 이상한 박력이 있는 것은 용자의 힘일까.
이 곤경의 안에서도 이길 거라고 착각시키는 두 사람의 모습에, 미라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나서 도그마를 강하게 쳐다보았다.
"단장님, 지휘를 맡겨주시겠습니까."
"미라인가......좋다, 너희들의 분투를 기대하겠다."
그 공중폭격의 와중에 신뢰하던 부단장과 보좌관을 잃었다.
기사단의 통솔이 수습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장 자신이 선두에 나서게 된다면 당연히 누군가에게 역할을 맡겨야 한다.
그 점에 있어 미라는 가문도 실력도 기사단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며, 도그마는 짧은 생각을 한 후 허가하였다.
말이 다리를 높게 치켜들며 울었다.
"모두를 부탁한다!"
그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전장을 우회하여 공국을 향해 달려나갔다.
질풍노도같은 사태에 남겨진 벨트로이 일행을 무시하고, 미라는 목에 손을 대며 각지에서 분전하고 있는 기사들을 향하여 통신마법을 통해 외쳤다.
"알겠나 네놈들! 지금부터 이 미라・사이파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지시에 따라라!"
사지 속에서 발버둥치는 많은 자들의 고막에 울렸다.
오만불손한 태도와 과잉확신에 찬 음색에, 그리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박력에 전장이 술렁거렸다.
위기도 관계없이 노성에 가까운 "어떻게 된 일이냐" 고 외치는 목소리에, 말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미라는 다시 한번 목에 손을 대며, 지휘관답지 않은 분노를 발산하였다.
"시끄러어어어어!! 입 다물고 따르기나 해 바보 놈들! 먼저 내가 있는 장소까지 후퇴해! 진형을 갖추고 응전하지 않으면 볼품없이 죽을 뿐이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기어서라도 여기까지 와!"
말투는 문제가 많았지만, 시간을 벌기로 한다면 지금처럼 흩어진 채로는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다.
정면에서 부딪힐 수 있는 수도 없어진 기사단이 연명하기 위한 방법은, 총력을 한 곳으로 모아 지구전에 돌입할 수 밖에 없다.
"미라 지휘관. 그래서는 마물들이 왕도로 빠져나가지 않겠습니까?"
바레일이 알마스라고 불렀던 마술사의 질문은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미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도에서 마물과 상대했을 때, 녀석들은 도망친 우리들을 항상 뒤쫓았다. 신도에서 아무리 벗어났어도 그랬다."
그 그라도라와 조우했을 때도 도망칠 기미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 공국은 마물에게 단순한 명령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향하는 방향을 정하고 직진시키며 보이는 대로 죽이는 정도로만. 그러니 우리들이 왕국과의 사이에 진을 친 이상 저것들은 무시하며 나아가지 않아."
그걸 듣고 알마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깨달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폭탄을 대량으로 투하한 마조들이, 습격도 안하고 계속 하늘에 떠 있는 것이다.
가져온 폭탄을 날라서 투하할 뿐인 명령밖에 내릴 수 없다고 한다면, 하늘의 전력을 감시하기 위함이라 해도 놀게 놔둘 이유가 없어서, 미라의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마력에는 얼마나 여유가 있나."
"저는."
"아니, 전체적으로 말이다."
".....아마 4할 정도라고 봅니다. 대규모 마술의 운용은 무리지만, 앞으로 몇 시간은 싸울 수 있겠죠."
"좋아, 그만큼 있으면 방법은 있겠구나. 벨트로이・바제스! 그 계집과 함께 전선으로 가서 덫을 설치하고 와! 도움이 될 테니 데려가 달라고 말했었으니까 이용하겠다!"
"전선이라니......."
"벨트로이 씨."
명령을 받은 벨트로이는 불안함에 필미리아를 보았지만, 그녀는 강한 의지로 한번 끄덕였다.
그걸 본 벨트로이도 알았다는 듯이 끄덕이는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미라는 리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발・오드・슈트라이프, 마술부대를 이끌고 참호를 파게 해. 되도록 옆으로 넓고, 길게 말이다."
"알겠습니다."
미라의 생각은 아마 틀리지는 않았다.
시간을 버는 방식이며 분명 진군은 늦출 수 있다.
하지만, 미라답지 않다고도 생각하였다.
"미라 대장각하는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리발의 질문에, 미라는 입가를 들어올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마물을 앞에 두고, 조용히 있을 리가 없잖아?"
◆
에스텔드 바로니아, 왕성.
미스릴에 휩싸인 알현실의 중앙, 거대한 옥좌의 앞에 선 왕은 허공에서 정신없이 손을 휘젓고 있었다.
눈앞에 떠오른 것은 무수한 창. 반투명한 영상에는 다양한 정보가 떠올라 있었고, 아군만이 아닌 전장까지도 들여다보였다.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카론에게 있어 비장의 수라고도 할 수 있는 스킬 중 하나.
장시간 길러온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눈이 돌아버릴 정도의 문자와 영상을 돌러보며 군의 편성을 진행하고 있었다.
"카론."
소리없이 열린 문에서 들어온, 검은 기모노를 약간 풀어헤친 쿠치나시히메가, 신하에게 허락된 위치까지 나아가서 이름을 불렀다.
카론은 눈길도 주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우에의 준비는 끝난 모양이니라. 에레미야와 먀르코도 지정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다지 뭐냐."
"알고 있어."
"그렇겠지. 하지만, 이런 건 형식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거대한 손톱을 움직이면서, 익살맞게 웃어보아도 반응은 없다.
구치나시히메는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며 한숨을 쉬고는, 재미없다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카론을 보았다.
떠오른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한 위엄이 있다. 이 넓은 알현실에 차오른 중압감은 정말 기분좋았다.
"저기, 카론."
"뭐지?"
"너 말이야. 즐거우냐?"
손이 뚝 멈췄다.
"즐겁다?"
뭘 즐겁다는 생각하는 걸까.
자신이 사랑하던 게임이 현실이 되었어도.
부하인 몬스터가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카론은 진심으로 즐겁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인이 돌연 왕이 되어, 지금까지는 없었던 책임이 무겁게 짓누르게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도 마음을 소모하고 있는 지금.
뭐가 재미있는 것일까.
적어도, 안심과 불안으로 일희일비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선 피로 때문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다.
그 증거로,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했는지 카론으로선 전혀 짐작이 안되었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ㅡ
"이제부터,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 일이 끝난다면, 조금은 시간이 생기겠지.
그 때부터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냐......그럼, 빨리 끝내야겠구나."
"그래."
편성한 군의 스테이터스를 바라보면서 맞장구쳤다.
랭크도 레벨도 공국군보다 낮은 대신에, 수와 다양성으로 공격하는 전통적인 편성.
신도 때처럼 압도적인 폭력으로 단번에 제압해도 좋지만, 이번엔 목적이 다르다.
에스텔드 바로니아에는 질서가 있으며,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마치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소형 마물이 대열도 없이 출발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최악이군."
정말 한 순간.
이제부터 많은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즐겁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성에 눌러앉아 화면을 건너 지시를 내는 행위에는 현실감이 없다.
훈계하듯이 주먹을 강하게 거머쥐고, 정면에 나타난 버튼에 손을 대었다.
작게 숨을 빨아들이고, 뒤죽박죽이 된 감정을 깊은 한숨과 같이 토해낸다.
"전군, 행동을 개시하라."
주저없이, YES를 눌렀다.
전장 모두를 뒤덮는 듯이 펼쳐진 진홍의 원환.
state of war의 문자를 올려다보며 무엇을 생각하는가.
마물들의 미소에 섞여서, 카론의 입가도 쓸쓸함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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