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제4화
    2023년 10월 09일 20시 08분 38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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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후, 바삐 움직이는 발소리에 이어 평소보다 조금 더 힘찬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하자, 첼시가 굴러들어 오듯 방으로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죠 ......! 식사는...... 아."

    "응. 미안."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는 나를 보고, 첼시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하게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재촉하자, 그녀는 슬그머니 다가와서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첼시에게 말을 걸었지만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며 메이드가 가져온 저녁 식사는, 이미 거의 다 비어 있었다. 첼시 덕분에 조금씩 변화한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리면 아까워서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우울해하는 걸 보니 역시 기다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권태감은 계속되고 있었다. 요 며칠은 오전에 첼시가 책을 읽어준 뒤 이런저런 소감을 주고받다가 오후가 되면 잠을 청하고 있다. 마력이 회복될 기미도, 독기가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소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자고 있었어?"

    "어, 어떻게 아세요?"

    "뺨에 이불 자국이 있어서."



     손을 뻗어 손끝으로 그곳을 만지자, 첼시는 수줍은 듯이 눈가를 붉혔다. 여전히 내가 만져도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도 졸린 것 같았고."

    "...... 어제 밤을 새우는 바람에........"



     책이라도 읽고 있었을까. 그녀는 정말 독서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읽는다고 했다. 이 집에 있는 책도 마음대로 읽어도 된다고 했더니, 내가 잠든 동안 방에서 혼자 이것저것 읽고 있는 모양이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은 나에게 그날 읽은 책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뭐, 가끔은 괜찮지. 나도 매일 낮잠을 자고 있고."

    "오스왈드 님은 요양 중이시니, 그게 일이잖아요."

    "너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일이다."

    "...... 저는, 달라요."



     약간 간격을 두고 대답한 첼시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양손으로 치마를 꽉 쥐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내가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을 때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롭게 지내기를 바랄 때 말이다. 그녀는 미안한 듯, 혹은 당황한 듯 머리를 숙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또다시 새파란 얼굴을 하면 불쌍하기도 하고, 다시는 떠올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서다. 솔직하고 표정이 풍부한 첼시를 생각하는 마음은, 사실 약혼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여동생에 대한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안 좋은 기억에 대해서는 일단 덮어두고 싶은데, 그녀는 가끔씩 스스로 기억의 뚜껑을 열더니 슬픈 표정을 짓는다.



    "...... 처음에도 말했듯이, 나를 돌봐주는 건 의무가 아니다. 네가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쫓을 생각도 없고."

    "......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마법을 잘 못 써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도 아닌데. 누구와 비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말투를 보아하니, 첼시는 내 밥 시중을 드는 것조차도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떻게든 좀 더 여유를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한 입까지 다 먹었다.



    "첼시, 미안하지만 식기 좀.......앗."

    "왜 그러세요?"

    "아니, 머리카락이."



     내 머리는 등의 중간 정도까지 내려왔다. 백금빛 머리는 마력이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머리카락에도 어느 정도 마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길게 늘어뜨린 채로 있었다. 하지만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금처럼 걸리거나 뒤척일 때 귀찮아서, 솔직히 방해가 될 뿐이다. 머리카락에 깃든 마력 따위야 별 것 아니고, 그마저도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차라리 잘라버릴까.



    "그럼, 저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받은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첼시는 방에서 나갔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하얀 리본이 들려 있었다.



    "저번에 도구를 사주셔서 ...... 어제 저녁에 막 완성했어요."



     자세히 보니, 그 리본에는 에메랄드그린의 실로 자수가 놓여 있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이걸 위해서 밤을 새웠던 것인가.



    "호오, 자수를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토라진 듯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는 첼시를 보고 살짝 웃으면서, 잘 보겠다며 리본을 받아 들었다. 그녀에게 자수가 안 좋은 기억이 아니라면, 도구를 사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은데?"

    "고마워요."



     리본에는 여러 가지 식물들이 정성스럽게 수놓아져 있다. 그것을 손끝으로 쓰다듬고 있자니, 문득 기분이 묘하다.



    "첼시."

    "네."

    "너, 마법은 거의 못 쓴다고 했지."

    "네. 아주 열심히 노력하면 손끝에서 물 몇 방울만 나올 수 있을 정도예요."



     그 정도면 마력이 적은 평민 세 살짜리 아이 수준이다. 그녀는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 이 리본, 아주 조금이지만 마력이 깃들어 있어."

    "네?"

    "내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지만, 치유 마법과 ...... 성 마법이었다."

    "성마법 ......?"

    "그래, 놀랐다."



     성마법은 물건에 정착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역대 성녀들 중에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 때문에 그녀들은 직접 땅을 정화하며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정착시킬 수만 있다면 동상 같은 것에 정착시켜서 마을마다 두었을 텐데.

     치유 마법의 정착도 불이나 물에 비하면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치유마법에 특화된 숙련된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치유마법을 담은 팔찌나 펜던트는 엄청나게 비싸다.



     정말 극소수이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정착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대단한데......"

    "오스왈드 님이 낫기를 바라면서 수놓았기 때문일까요?"

    "후, 귀여운 말을 해 주기는."

    "아, 아뇨."



     볼을 붉게 물들인 첼시의 손에 리본을 돌려준다. 달아주겠냐고 묻자, 그녀는 기쁜 듯이 내 머리를 빗어주었다.



    "...... 그럼, 조금은 오스왈드 님의 도움이 될까요?"

    "글쎄."

    "......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방법은 대단하지만, 마력 자체가 너무 약해."

    "그, 그렇죠......"



     슬픈 눈빛으로 말을 마친 첼시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앗......! 오, 오스왈드 님?"



     쓰러진 그녀를 껴안고서,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뺨을 묻는다.



    "내 마음에는 잘 통했다. 대단한 마법이야."

    "......네 ......!"



     나를 생각하며 밤을 새운 이 여자가 사랑스럽다. 그 울먹이는 소리는 눈치 못 챈 척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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