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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의 가도를 천천히 달리는 루시아나 일행의 마차. 출발이 늦어져서 타이밍이 어긋난 탓인지 주변에 다른 마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 펼쳐진 것은 장엄한 자연의 모습. 마부석의 뒤로 세 소녀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인간이라면 마음이 편해질 법한 상황에서, 그레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못 들었다고! 왜 이 녀석들의 여정을 따라가야만 하는 거냐!)
눈을 떠보니 푸른 하늘 아래. 덜컹덜컹 흔들리는 바구니 안에서 깨어난 그레일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루시아나 일행의 여행에 동행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불쌍한 강아지 그레일이다.
안타깝게도 루틀버그 백작가에서 "너도 함께 여행을 떠날 거야!" 라며 반려동물에게 알려주는 기특한 존재는 없었던 것 같다. 뭐, 식사 외의 시간에는 낮잠을 자던 그레일이 단순히 못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바구니 안에서 꼬리를 불쾌하게 흔들며, 그레일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되돌아본다.
선대 성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봉인된 지 수백 년. 무너져가는 봉인을 풀기 위해 꼭두각시로 딱 맞는 인간을 얻기 전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텐데...... 정신 차리고 보니 개 같은 강아지 인생, 아니 견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강아지 생활. 맛있는 밥, 적당한 운동, 편안한 잠자리 ...... 아, 이 얼마나 무서운가! 안락이라는 이름의 풀솜으로 목을 조이고, 마왕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나날. 강아지의 육체가 가진 생존 본능이, 마왕의 자존심을 버리고 인간들에게 아양을 떨라고 한다!
(정말 무섭도다! 이것이 성녀의 덫인가!)
여전히 봉인된 채로 부정한 마력의 대부분을 잃은 마왕은, 새로운 빙의체로 선택한 강아지의 감정에 저항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지금은 자신이 표면에 드러나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주도권을 빼앗길지 알 수 없다. 지금의 마왕은 그만큼 약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녀와 그녀에 속한 자들과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성녀 본인인 멜로디는 물론이고, 멜로디가 만들어낸 마법의 인형 메이드 셀레나 등은 더더욱 그렇다. 무도회에서 만난 백작가의 세 사람은 트라우마 그 자체라서, 그렇게 되면 그레일에게 유일한 위안은 신입 수습 메이드인 마이카가 유일한 위안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
(저렇게 성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법 도구 같은 거나 갖고 다니기는! 마이카 이 배신자아아아아!)
바구니에 누워 앞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레일.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를 발로 짓밟은 성녀의 마력이 원망스럽다! 그런 마왕 외에는 알아듣지 못할 욕을 속으로 내뱉었는데, 그레일의 마지막 희망은 지금 마부석에 앉아 있는 류크만 남게 되었다.
(만약 이 녀석까지 성녀에 걸려들면 ...... 나는 더 이상 현세에 머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오해할 것 같은 대사다. 요컨대 강아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자신은 꿈의 세계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그레일은 자신의 마음을 지탱하는 마왕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질 것처럼 느꼈다.
"끼잉(한심해......)"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무심코 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자 크고 따뜻한 류크의 손이 그레이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그 감촉에 강아지의 몸은 저항할 수 없었다.
(왜 이 몸은, 이런 것을 기분 좋게 느끼는 걸까 ......?)
어리석은 인간을 도살할 때 느꼈던 그 미친 듯한 쾌감과는 전혀 다른 '기분 좋다'는 느낌. 둘 다 똑같은 '기분 좋음'일 텐데, 강아지의 몸은 그 커다란 손바닥을 더 원하고 있었다.
마왕은 시선을 들었다. 류크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의 손짓은 매우 다정다감했다. 아무리 힘을 잃었다지만, 마왕 글레일은 이해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예전에 꼭두각시로 삼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 이 남자는, 내가 그때의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 그래도 지금처럼 나를 쓰다듬어 ...... 줄까 ......?)
생각이 녹아내린다. 강아지의 몸이 잠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레일은 참을 수 없다.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그레이스는 꿈의 세계로 떠났다.
ㅡㅡ쓰다듬어 줄까? 마왕은 아직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중얼거린 그 말의 의미를.
강아지를 핑계 삼아 자신의 감정의 변화를 모르는 척하고 있는 지금은,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