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057 끝이면서 시작
    2021년 03월 12일 15시 10분 39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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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ncode.syosetu.com/n6977fi/98/

     

     

     

     바깥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을 들으며, 난 눈을 떴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저녁식사 때 갖고 왔던 빵을 삼키며, 수첩으로 오늘 의태할 모습을 확인한다.

     오늘은 에리비라스톨리기나인가.

     

     날마다 바꾸는 의태의 순서가 다시 내 반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에리비아는 대놓고 불만을 말하는 타입은 아니니 아직 나은 편이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자기 모습으로 의태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어쩔 수 없다.

     왜냐면, 난 귀여우니까.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자신보다 귀여운 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철이 들고 나서 계속, 난 귀여워지라고 배웠다.

     인간이 요구하는 귀여움을, 알기 쉽게, 과장되게.

     

     제대로 몸에 스며들고 말아서, 무의식적인 행동이 된 움직임.

     느슨히 쥐고서 입가에 대는 손.

     자그마한 보폭.

     숙인 고개.

     말을 할 때마다, 가볍게 끄덕인다.

     혀가 짧은 듯한 어조.

     

     철저하게 배운, 편견에 가득 찬 귀여움.

     

     하지만 인간은 이 귀여움을 좋아한다.

     특히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진 인간 남자들은.

     

     토나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서다.

     귀여움이니 뭐니, 아무래도 좋다.

     

     내부에 삼켜진 빵이 소화된 것을 확인하고, 난 에리비아의 모습이 되었다.

     오늘은 실기시험도 없으니 교복도 의태로 끝낸다.

     머리 모양과 옷 모양에 신경쓰지 않아도 완벽하게 생각한대로 의태할 수 있는 것은, 슬라임의 특권이다.

     몸단장도 필요없기 때문에 아침에는 아슬아슬할 때까지 잠들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의태를 하니 방이 갑자기 좁아졌다.

     

     언젠가, 나의.......나만의 모습을 가진다면, 작은 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 편이 방을 넓게 쓸 수 있고, 분명 귀여울 테니까.

     

     .......귀여우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정말 싫어진다!

     

     

     

     교실에는 빨리 들어간다.

     되도록 의태한 본인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같은 반이라면, 아무래도 만나게 되어버리지만......내가 자기 모습으로 의태한 사실을 눈치챈 순간의 놀람과 혐오의 표정.

     먼저 앉아서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그 표정을 보지 않고 끝난다.

     

     "오늘도 평안하신가요."

     "오오, 안녕하세요."

     "안녕."

     

     인사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난 계속 책상 위에 놓은 손을 바라본다.

     에리비아의 손은 예쁘다.

     손가락은 가늘고 길며, 손톱은 작지만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부분까지 재현하는 것은 슬라임이라는 종족인 탓인 걸까?

     

     "레이비아, 어째서 이 자리에 앉았나요?"

     "네?"

     

     누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매우 놀랐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 따윈 없었으니까.

     

     "어라? 자리를 바꾼 걸까요?"

     

     푸근히 미소지으면서, 조금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한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그보다 옅은 색의 속눈썹이 덮는다.

     아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자,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아아, 예쁘다.

     기본적인 '귀여운 움직임' 에 불과한데, 이상하게 예쁘다.

     

     순간 넋이 나간 후, 날 들여다보는 사람이 레티시아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래, 그 때의 감사를 말해야 해!

     골렘은 날 상처줄 수 없지만, 구해준 일에는 변함없다.

     

     도와주었다.

     

     슬라임인 날 도와준 사람이라니, 여태까지 없었다.

     그러니......

     

     "아, 아니에요. 자리는, 바뀌지 않았어요."

     "그렇지? 그럼, 어째서 이 자리에? 아, 친구들과 대화라도 하고 있었나요?"

     "아, 저기, 그."

     

     ......어쩌지.

     이 사람, 날 에리비아 본인으로 생각하고 있네?

     의태한 것을 눈치채지 못 했나?

     내가 슬라임이라는 걸 몰라?

     

     어쩌지......

     

     "친구가 생기면, 소개해줘요."

     

     미소짓는 그녀의 앞에서, 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었다.

     

     "아, 아니, 아니에요."

     "다른가요?"

     

     내가 슬라임이라고 안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할까?

     헷갈린다며 화낸다면 좋다.

     익숙하다.

     

     "아니에요, 저, 아니란 말이에요."

     "네에?"

     

     하지만, 슬라임이라는 이유로 혐오한다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에리비라......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정하지 못한 사이에, 에리비라 본인이 교실에 들어왔다?

     

     "아, 오늘은 제 차례인가요?"

     "예....... 죄송해요."

     

     에리비라의 말에 미리 사과해둔다.

     정말, 사과하는 거 버릇이 되어버렸다.

     

     "저기, 어떻게 된 일인가요?"

     "네? 아아. 그러고 보면 언니가 오고 나서 이 반의 순서가 된 것은 처음이네요."

     "에리비라, 전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 반에 에리비라와 똑같은 사람은 없었잖아요?"

     "저기,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좋을지. 어쨌든 제 모습을 한 저 사람은, 마리온루루에요."

     "마리온? 어? 이 반에는 마리온이 두 사람있나요?"

     "아니, 한 사람이에요. 그 때 골렘이 폭주할 때 휘말렸던 마리온이에요."

     "예......"

     

     에리비라가 담담하게 나에 대해 설명한다.

     중요한 부분은 얼버무리면서.

     풀솜으로 목을 조른다는 말은, 이를 말한다. (역주 : 어영부영한 말로 골탕을 먹인다는 뜻)

     

     "네에에?"

     "마리온의 마법은 '의태' 라서요. 그래서 오늘은 저로 의태한 거에요."

     "의태. 의태라. 과연, 그런 일이었네요! 그건 그렇고 정말 똑같아."

     

     내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본다.

     보고 있는 건 에리비라의 얼굴이라고 알고 있지만, 왠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아으~"

     "목소리도 똑같네요."

     "아으,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면, 부끄럽다고요."

     

     정말 부끄럽다.

     물들여진 자신의 '귀여운' 행동과 어조가.

     

     "미안해요. 아! 그래. 골렘 때 괜찮았나요? 상처는요?"

     "그, 그건, 괜찮아요. 전혀 문제없어요. 죄송해요, 저 따위를 위해 상처를 입게 만들다니."

     "따위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네요."

     "저기, 이제 그런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건 어떠려나? 누군가가 위험할 때 돕는 건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도울 수 있을 땐 돕겠어요."

     "그래도."

     

     제가 슬라임이어도 당신은 구해줄 건가요?

     

     말해야 해.

     적어도 내가 말해야 한다, 나의 정체를!

     

     "언니, 그럴 때의 마리온은 괜찮아요."

     "괜찮다고 해도......"

     "마리온은, 물리공격이 듣지 않는 체질이니가요."

     "물리공격무효!? 대단해! 대단한걸!"

     "아, 그런, 그런. 저의 것은 종족특성 같은 거라서, 그 대신 마법에는 매우 약해요."

     "종족?"

     

     이 타이밍이다, 지금 밖에 없어!

     

     "새언니! 안녕하세에요!"

     "하우!"

     

     입을 열기 전에, 레티시아가 갑자기 밸런스를 잃고 쓰러졌다.

     

     "!?"

     

     그 순간에 어째선지 갑자기 의태가 풀렸다!

     어째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아, 끝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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