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감에 말문이 막힌 태크 왕을 대신해 란 왕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환대의 연회. 올드태크 왕국을 끝낼 새로운 통치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며 경건하게 순종하는 패배자의 참석. 패전국의 최후의 길을 왕이 앞장서서 걸어간다. 그것은 하나의 지옥일 것이다. 무엇이 무혈입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평화적이란 말인가. 유후 공주는 드레스 안쪽에 숨겨둔 칼을 살며시 만지작거리며 피처럼 뜨겁고 진한 눈물을 흘렸다. 부끄러움 따위는 없다. 그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그런 속임수 같은 짓을 쿨한 얼굴로 떠들어대는 저 증오스러운 흑사자를 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여신님! 왜인가요! 왜 이런 만행을 허락하시는 건가요!)
"그야, NTR은 신계에서도 인기 있는 패권 장르 중 하나니까."라는 여신의 대답은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다.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서도 닿지 않았다.
◇
"지금부터 조인식을 거행한다"
다음날 정오. 유후 공주를 덮친 것은 더 큰 악몽이었다. 조인식을 위해 준비된 의자에 기대어 앉은 황제 이그니스의 오른쪽 무릎에 란 왕비가 앉아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이상하다. 이그니스의 가슴에 기대어 뺨을 비비며 애교 섞인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나라를 걱정하는 현명한 왕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완전히 멍하니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저건 이제 이그니스가 원한다면 기꺼이 이그니스를 위해 나라를 불태울 독부의 얼굴이라고 딸이 확신할 정도로 변모한 모습이다. 완전히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여기서부터다. 조인식인데도 불구하고 이그니스의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원래 그곳에 앉아야 할 왕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답은 이그니스의 왼쪽 무릎이다. 란 여왕과 마찬가지로 탁 왕도 이그니스의 무릎 위에 앉혀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어, 태크 왕과 란 왕비가 함께 황제 이그니스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네놈! 아버지와 어머니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응? 아아, 네가 유후 공주인가."
무심코 칼을 뽑아 들고 최악의 황제 앞에 뛰어나온 유후 공주는 절대 나쁘지 않다고, 호크가 여기 있었다면 한숨 섞인 박수를 쳐주었을 것이다.
"자자, 유후......., 그런 짓은 하지 말거라. 폐하, 죄송합니다....... 저희 딸이 정의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숙한 아이인지라.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이니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그래요, 유후. 우리들은 그저 이그니스 님과 밤새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화해했을 뿐이고, 이그니스 님이 얼마나 훌륭한 남자, 아니 통치자이신지 알게 되었을 뿐이랍니다. 그렇죠, 여보?"
"그래. 이그니스 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몸도 마음도 나라도 백성도 바칠 만한 진정한 통치자이고 말고. 너도 언젠가 태어난 것의 의미,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다."
"알고 싶지 않아요!"
40대의 어머니가 외간 남자에게 NTR한 것만으로도 악몽인데, 동시에 50대의 아버지까지 포섭당하는 것은 10대 소녀로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뭐가 싫어서 남편이나 딸의 모습 따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이그니스에게 푹 빠진 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까지 아내와 자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니 이 무슨 사태인가. 충격으로 쇼크사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유후 공주의 뇌혈관은 터지기 직전이다.
"이그니스 님. 이 지루한 조인식은 빨리 끝내고 빨리 방으로 돌아가요. 언제까지 이 나라에 머무르실 건가요?"
"글쎄. 국내 시찰과 여러 가지 작업을 포함해서 일주일 정도일까."
"그럼 1주일 동안 저희들이 정성껏 대접하고 안내해 드릴게요. 안 그래요, 여보."
"그래, 그래야지."
잊고 있었거나, 아니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뭐를 잊었냐고? 그야 물론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이 통하는 동료와 담소를 나누는 즐거움이 틀림없잖아요.
"이그니스 마마이트으으으으으!!"
이럴 거면 차라리 나라가 폭격으로 불타는 게 천억만 배는 낫다며 유후 공주는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참고로 그녀는 훗날 반제국 동맹(이그니스 피해자 모임)에 합류하게 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