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인은 학교에서 영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냉정한 시선을 그녀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오랜 평화와 풍요로움 속에서 귀족의 의무를 잊어버린 영애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 영애를 왕세자비로 맞이해봐야 블레인의 고생만 늘어날 뿐이다. 차라리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후계를 위해 결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때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고 조용하여 블레인을 괴롭히지 않는 영애를 선택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체념의 미소를 짓는 블레인의 모습에, 라이트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과외 실습이구나. 올해는 이지 자작가의 쌍둥이도 참여하는데, 전하께서도 기대가 되시죠?"
이지 가문의 쌍둥이. 그 말을 듣자 블레인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이지 자작가의 차남과 장녀. 얼굴이 꼭 닮은 남녀 쌍둥이이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검술에 능하고 직설적인 다프와, 마술에 능하고 신중한 러브. 측근인 맥스는 더프를, 라이트는 러브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한다. 블레인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재능을 드러내는 쌍둥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자작가라서 비록 신분은 낮지만, 자신의 측근으로 맞이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지 자작가 사람들은 라스 후작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쌍둥이 역시."
맥스는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블레인은 문득 기억을 떠올렸다.
현 국왕에게는 나이 차이가 나는 왕의 동생이 있다. 현재는 공작 작위와 영지를 받아 왕적을 떠났지만, 국왕과의 사이는 변함없이 좋은 편이다.
그 왕의 동생과 학교의 동급생이었던 이지 자작가의 후계자, 할 이지의 일화는 유명하다. 왕의 동생과 절친한 친구로서 눈매가 곱고 성적이 우수하며 무예도 뛰어나 당시의 왕의 동생과 인기를 양분하고 있었다.
왕의 동생은 할 이지를 측근으로 삼고 싶어서 본인과 이지 자작가에 여러 번 타진했지만 거절당했다. 할 본인이 밝힌 이유는 라스 후작가를 섬기고 싶으며, 자신의 충성은 라스 후작가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스 후작가는 여러 후작가 중 하나다. 중견쯤 되는 후작과 후계자는 왕궁에 근무하고 있지만, 중책을 맡고 있지는 않다. 영지 역시 논과 밭이 많은 한적한 곳이라서 큰 수익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라스 가문의 구성원들도 무해하며 평범한 사람들뿐이다. 성실하고 소심한 당주, 온순한 부인, 당주를 닮은 성실한 후계자, 부인을 닮은 장녀.
왕족이 측근으로 원하는 우수한 남자가 일부러 선언까지 하면서까지 섬기고 싶은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왕의 동생이 라스 후작가가 곤란해하지 않도록 대체자를 소개해주겠다고까지 말했지만, 할 이지는 눈을 부릅뜨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라스 후작가에 할의 등용을 타진했을 때, 할이 원한다면 상관없다며 승낙을 받았지만, 이를 알게 된 할이 격분하여 왕자의 동생과의 결별을 원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까지 거절당하자 왕의 동생도 포기했지만, 아직도 라스 후작 가문을 자주 찾아가면서 권유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모양이다.
"라스 후작가에 왜 그렇게까지 충성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쌍둥이도 그 할 이지 못지않은 충성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어렵겠지만, 이번 실습을 통해 어떻게든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군. 너희들, 부탁한다."
블레인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두 측근은 납득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하고는 제각기 검술과 마법학 수업에서 선배로서 지도를 해주며 친분을 쌓아왔다. 쌍둥이도 그 태도로 보아 두 사람을 존경하는 듯 보였다.
왕세자비한테서 기대할 수 없는 만큼, 우수한 측근이라도 모으고 싶다. 이지 자작가의 쌍둥이와, 가능하다면 그들의 형인 할을 수중에 두고 싶어 하는 블레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