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제1부 첫사랑의 행방 2
    2023년 09월 22일 20시 23분 12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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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성녀는 신전의 부지에 묻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엘세는 부모님의 곁에 있기를 원했는지, 루피노의 주도로 그녀의 유골은 고향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 미안해, 엘세]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그녀의 고향을 찾아서, 무덤 앞에서 사과의 말을 되뇌었다.



     ㅡㅡ약함은 죄다. 내가 약해서, 엘세는 죽었다. 내가 약하니까, 엘세는 살해당했다.



    (보호받고 구원만 바랄 수밖에 없는 나는 너무 어리고, 정말 무력해)



     아무리 후회해도 부족하다. 그날의 엘세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계속 이 자리에서, 엘세의 곁에서, 그냥 계속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엘세가 준 생명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



    [나, 꼭 강해질래. 그러니 지켜봐 줘]



     나에게는 엘세가 인정해 준 재능과, 엘세가 준 건강한 몸이 있으니까.



     엘세가 사랑했던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엘세를 죽인 사람을 찾아내어 죽이기 위해서.



     나는 누구보다 강해지겠다고, 사랑하는 그녀에게 맹세했다.





     ◇◇◇





    [──엘세. 오늘부로 27살이 되었어. 그 시절의 엘세보다 한 살이나 더 먹었다니, 이상한 느낌이 드네]



     그 후,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죽기 살기로 노력했고, 많은 피를 흘리면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엘세의 고향을 찾아갔고, 이렇게 그녀의 무덤 앞에서 보고를 계속하고 있다.



    (엘세가 있었다면 화낼 일도 많이 해왔지)



     그러나 깨끗한 일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 17년 동안 몸소 배웠다.



     나는 엘세처럼 될 수 없다. 그녀가 얼마나 특별하고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 곧 왕국에서 성녀가 온다. 이용하기 위해 결혼을 한다는 걸 알면, 엘세는 분명 화를 내겠지]



     엘세가 세상을 떠난 후, 모든 것이 변했다. 변해버렸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나라는 이제 형체도 없다. 저주로 인해,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를 구하고, 아직도 찾지 못한 그녀를 죽인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나는 아직 할 수 있어]



     엘세를 떠올리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내 인생에서 단 2년ㅡㅡ그녀와 함께 보낸 날들은, 내 삶의 전부이자 자양분이었다.



    [다음에 엘세와 만날 때, 잘했다는 말을 듣도록 열심히 할게]



     그녀가 좋아했던 꽃을 바치며 미소를 짓는다.



    (...... 만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바랐을까)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엘세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간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괜찮다면, 펠릭스 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파론 왕국에서 온 성녀, 티아나 에버렛은 별난 사람이었다.



    "펠릭스 님에 대해 알고 싶어요"



     '텅 빈 성녀' 등으로 불리며 아무런 힘도 없이 학대받아온 열일곱 살 소녀. 하지만 그녀는, 그런 모습 따위는 전혀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저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고, 마치 자비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펠릭스 님은, 사모하는 여자가 있나요?"

    "...... 이 이상 참혹한 피해를 입혀서는 안 돼요. 반드시 모든 저주를 풀어 보이겠어요."



     어느 사이엔가,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을 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용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이 로드 좀 빌려주세요! 꼭, 필요해요......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으니까요."

    "만약 또 다친 사람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마력의 한계는 있지만, 조금은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그녀의 올곧은 모습은, 퇴색된 나의 눈에는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났다.



     그것은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내가 가장 동경하는 모습이었다.



    "......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요?"



    "저는 티아나 말고는 춤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해주면 좋겠군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녀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에 조바심을 느낀 것이다.



    (정말, 나답지 않아)



     나는 엘세 이외의 사람에게 마음이 끌릴 일이 없고,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래도 몇 번이나 티아나가 엘세와 겹쳐 보이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혹시'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쓸데없는 기대를 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펠릭스! 집중해!]



     그런 와중에, 붉은 동굴에서 티아나가 그렇게 부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멈췄다.



     분명 우연히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알면서도,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고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의식을 잃기 전에 "고마워, 역시 천재야."라고, 쉰 목소리로 말해주었던 것이다.



     ㅡㅡ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이쪽으로 뻗어서, 나의 왼손과 자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나는 어렸을 때 다시 심해진 저주로 인해 손과 손가락 끝이 자주 아팠고, 그녀는 항상 나와 손을 잡을 때 유일하게 아프지 않은 새끼손가락의 손가락 끝만 걸어주고는 했다.



    (...... 아)



     나와 그녀만의, 이상하지만 상냥한 연결 방식.



     차갑게 식은 손가락 끝을 부드럽게 잡아준다. 티아나는 엘세의 환생이라고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곧장 상처투성이인 그녀를 왕성으로 데려가서, 그 후로 계속 곁에서 지켜보았다.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



     그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티아나와 함께 보낸 몇 주간의 시간을 떠올렸다.



    [몸 상태는 어때요?]

    [...... 특별히 아무 문제없었습니다만]

    [다행이다......]



    [아, 오렌지플라워로 해도 괜찮을까요?]

    [......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후후, 즐거워 보여서요]

    [펠릭스 님, 춤을 정말 잘 추시네요]



    [하지만 저는, 비를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짐작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 이렇게나, 그녀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감사도, 사과도, 이 가슴속에서 계속 피어오르던 생각도, 지금까지의 일도. 전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번만큼은 절대 실수하지 않아. 이제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반드시 내가 지켜낸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향해, 기도하듯 중얼거린다.



    "...... 부탁이니, 제발 깨어나줘. 티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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