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34부 291화 버질과 카레
    2023년 04월 11일 02시 32분 02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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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인기척도 활기도 없는 한산한 빈민가. 슬럼가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치안이 좋지 않은 해 질 녘의 거리를, 버질은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그렇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걷는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걷는다. 너무 후한 고용주 덕분에 주머니가 항상 과열된 상태지만, 월급날 때 약간의 보너스가 들어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간간이 그늘에서 엿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지만, 특별히 노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서 도착한 곳은 번개의 마도구로 청자색 네온이 지저분하게 깜빡이는 싸구려 분식집이다. 아직 영업시간이 아닌 것 같지만, 버질은 닫힌 표지를 무시하고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연다.

    "여어 에나 할머니, 아직 살아있어?"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당연히 살아있지!"

    "그거 다행이다!"

     분식집, '에너지'의 점주인 에나 할머니가 혼자 운영하는 낡은 음식점이다. 가게 안은 좁지만 깨끗하고, 적어도 여기서 밥을 먹기에는 꺼려질 정도로 열악한 빈민가의 음식점에 비하면 꽤 깨끗한 편이다.

     그녀는 카운터의 뒤편에서 요리 준비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무단 침입자가 낯익은 얼굴임을 알아차리자 뒤돌아 서서 칼을 내려놓았다. 저 붉은 물방울은 토마토일까?

    "너, 또 성질머리도 안 고치고 온 게냐. 이제 완전히 부자가 되었으니, 더 좋은 가게에 가도 되련만."

    "무슨 소리야. 에나 할머니의 카레보다 맛있는 카레 따위는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가게밖에 못 봤다고."

    "헹! 그건 네 혀가 무뎌서 그런 거겠지!"

     욕을 하면서도, 젊었을 때 나름대로 미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날씬한 장신의 백발 노파는 버질이 선물로 가져온 유명 가게의 센베가 담긴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버질은 마치 친가 같은 태도로 카운터에 앉아서는,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았다.

    "요즘 경기는 어때?"

    "헹, 이런 빈민가의 경기 따위야 나빠지거나 더 나빠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겨."

    "그 말은 맞아."

     버질과 에나 할머니의 만남은, 버질이 아직 골드 저택에 오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아직 현역 창부였던 에나 아줌마와, 갓 데뷔한 청년 버질은 우여곡절 끝에 밤거리에서 만나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닌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에나 아줌마에게 버질은 그저 가난한 손님일 뿐이었고, 버질이 보기에는 돈만 밝히는 여자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리감으로 가끔 얼굴을 맞댈 정도로 친숙해진 두 사람의 관계는 버질이 꿈도 머리털도 모두 잃은 후에도, 에나 아줌마가 에나 할머니가 되어 은퇴하고 작은 가게를 차린 후에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자."

    "오, 땡큐!"

     할머니가 내놓은 것은 재료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듯한 빈약한 카레와 미지근한 물이었다. 루도 시중에서 파는 싸구려이고, 굳이 따지자면 토마토케첩과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로 순하게 맛을 낸 정도지만, 버질에게는 이것이 말하자면 엄마의 손맛과 같은,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먹어온 카레인 것이다.

     아직 큰 꿈과 희망에 불타오르던 시절. 꿈도 희망도 사라졌지만 머리카락만은 간신히 남아있던 시절. 머리카락마저 잃은 인생 밑바닥 아저씨였던 시절. 호크에 고용되어 인생이 90도 직각으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던 시절. 평생 먹어온 추억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맛.

    "응응, 이거야 이거. 맛있다!"

    "정말이지, 더 맛있는 카레는 좋은 식당에 가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텐데, 당신도 참 까다로운 사람이여."

    "괜찮다고. 좋은 카레는 좋은 카레, 좋아하는 카레는 좋아하는 카레. 난 둘 다 맛있게 먹을 수 있거든."

    "사치스러운 소리나 하기는, 정말! 그 양아치 같았던 네가 설마 이렇게 훌륭하게 출세해 버릴 줄이야, 세상만사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여......"

     나이가 들어도 어딘지 모르게 여자의 섹시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열심히 카레를 먹는 버질에게 보내는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다정하다.

     "너, 그거 먹었으면 얼른 돌아가. 요즘 여기 치안도 점점 나빠지고, 우리 집에도 가끔씩 양아치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불안해졌지 뭐여."

    "아, 아까 가게 앞에 있던 녀석들? 그 녀석들 같으면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뭐라고?"

    "그 녀석들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다시는 이 일대에 얼굴을 내밀지 못해."

     허리에 든,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신검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튕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카레를 입에 넣는 버질에게서 뭔가를 눈치챈 에나 할머니는 그려? 하고 감격스럽게 중얼거렸다. 버질이 '에너지'를 찾은 것은 오늘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가게 앞에서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 일을 정리하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임시 보너스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너도 안 좋을 때 왔구먼."

    "아니, 운 좋았어."

     일부러 찾으러 가는 수고를 덜게 된 버질은, 물수건으로 입을 닦고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할머니는 빈 잔에 이 가게에서 두 번째로 비싼 술을 부어주었다.

    "오, 웬일이래. 구두쇠 할머니가 크게 쏘는 일도 다 있네?"

    "지금의 한 마디로 유료화됐어. 카레값까지 제대로 내."

    "예이예이."

     버질은 겉옷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꺼낸 금화 한 닢과 함께, 금색 돼지 스티커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 팁이야, 팁."

    "너 치고는 화끈하네. 그래서? 뭔데 이 고약한 것은?"
     
    "행운과 행복을 부르는 고마운 지폐. 가게 문에 붙여둬. 나쁜 벌레가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싫어, 이런 꼴 뵈기 싫은 것. 내 가게의 경관이 망가지잖여. 좀 더 좋은 디자인이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어이어이, 그런 잔인한 말은 하지 말라고. 익숙해지면 돼지도 귀여운 법이야."

     고요한 가게 안에, 한가로운 평온한 시간이 흐른다. 버질은 에나 할머니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카레를 더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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