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154 천위마술사 서열 5위(2)
    2022년 09월 08일 23시 48분 56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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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https://estar.jp/novels/22241232/viewer?page=1445 

     

     

     

     "그런가, 과연..."

     

     

     박식의 진수란 이것이었던 것이다.

     대규모의 봉인결계.

     내부의 환경을 통째로 보전하는 술식.

     그것이야말로 박식오의의 정체.

     

     

     "그것이 비장의 수인가.

     그럼 이쪽도 전력으로 보답해주마."

     

     검은 띠를 몇 가닥 발현시켜서, 주위에 띄운다.

     애초에 이 결계 안에 있는 시점에서 뭔가의 효과가 나타나도 될 텐데, 그럴 기색은 없다.

     바니키스가 샤리아의 다음 행동을 신중히 엿보고 있던, 순간.

     

     

     "읏..!?"

     

     지면이, 시야가 흔들린다.

     갑자기 시작된 지진은, 사람이 서 있을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잘 보니 공간에 큰 균열이 가 있다.

     공격계의 공간간섭이라면 그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샤리아의 그것은 고정계다.

     상대를 봉쇄하는 목적으로 한 술식일 터.

     

     

     "..무슨."

     

     말하다가, 공간이 범상치 않게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샤리아가 백업을 발동시킨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바니키스의 공간이 파괴되려 하고 있다.

     

     초조, 혼란.

     그런 가정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바니키스는 어떻게든 용머리를 조종해서 샤리아에게 보냈다.

     

     하지만 샤리아는 그렇다 할 반응을 안 보이고, 다가오는 용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용머리는 잠깐 흔들렸나 싶더니 단번에 가속하여, 바니키스의 시야에서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고 말았다.

     

     

     "..............."

     

     무심코 물러선다.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원리로, 무슨 힘이 작동한 것인가.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고정되어 있다면 이동은 불가능할 터.

     지금까지의 박식과 뭔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반격해야만 한다.

     바니키스는 있는 마력을 긁어모아서, 그 모든 것을 술식으로 변환했다.

     

     

     "박식ㅡㅡㅡ"

     

     

     수백의 검은 띠를 주변에 대기시킨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1초도 지나지 않아 띠가 사라졌다.

     그다음은 하얀빛의 흔적만이 떠 있었다.

     

     

     "ㅡㅡㅡ읏...?"

     

     

     빠르다.

     사라진 순간을 지각하지 못했다.

     위력도 그렇지만,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지금까지와의 박식과는 완전 다르다.

     

     

     "...과연. 다른 공간에 봉인하는 술식이라는 건가."

     

     "아닌데요."

     

     

     샤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하고서, 맞은편의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용머리로 생각되는 생물이 납작한 상태로 달라붙어있었다.

     

     용머리, 만이 아니다.

     방금 바니키스가 꺼낸 박식도 벽에 달라붙어있다. 주목할 점은, 균열은 그부터 생겨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며, 유리에 딱딱한 것이 부딪힌 것처럼, 명백하게 뭔가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뭐냐... 대체 무엇을 한 게냐?"

     "하는 일은 지금까지와 똑같아요.

     제게 가능한 것은 대상을 지정해서ㅡㅡㅡ"

     

     샤리아의 띠가 뻗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반사적으로 용머리로 고기방패를 세움과 동시에, 방금 나온 용머리가 통째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용머리는 빛의 띠가 닿음과 동시에 부자연스럽게 가속해서, 벽에 부딪힌 것이다.

     마치 자력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 자리]에 고정시키는 것."

     

     쩌억.

     균열이 확대되어간다.

     

     

     "............"

     

     정신 차려보니, 호기심은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바니키스는 샤리아만을 원래의 공간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공간을 조작했다.

     하지만 이미 파괴가 진행 중이라 그런지, 바니키스의 지령을 안 듣는다.

     

     저벅.

     샤리아가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결국 고정시킨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 사이에 어긋남이 발생하는 거지요.

     고정하지 않은 공간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니, 본래의 의미로 고정한 공간과는 아무래도 좌표의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요."

     

     샤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고정되지 않은 공간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다.

     안 그러면 물리법칙은 성립되지 않는다.

     완전히 정지된 물체 따윈 없다.

     알 수 없는 것은, 고정된 공간과 그렇지 않은 것이 충돌하는 이유다.

     

     

     "알기 쉽게 설명해줄게요."

     

     샤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공간의 고정과 정지, 동결..

     사실 이것들에는 심도가 있어요.

     심도의 기준은 얼마나 지구에서의 영향을 받느냐 마느냐.

     지구라는 거대한 에너지 안에서, 얼마나 강하게 공간을 멈출 수 있는가.

     저는, 선대 당주였던 할아버님에 비해서 멈출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지만..."

     

     

     손가락을 흔든다.

     띠가 동여맨 곳은 바니키스의 목이었다.

     

     

     "...웃!?"

     

     "생물...그보다 인간을 고정시키는 일에 관해선 자신이 있거든요.

     인간에 한정 지으면, 저는 로긴스보다도 훨씬 잘 그 자리에 고정시킬 수 있어요."

     

     시야가 고속으로 흐르며, 벽에 부딪힌다.

     뼈가 삐걱이고 내장이 압박된다.

     그러자 바니키스도 마찬가지로 벽에 천천히 파고들어서, 균열을 새겨나간다.

     

     

     "뭐냐...이 힘은... 무엇이 날 끌어당기고 있지...!?"

     

     목에서 밑부분이 안 움직인다.

     고정이 성립되어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속으로 움직이는가.

     어째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나.

     

     

     "그러니까, 잡아당기는 게 아녜요."

     

     샤리아는 대담하게 웃고서, 손가락을 가리켰다.

     

     

     "큰 할아버님. 저는, 하나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착각을.

     사실, 저를 포함한 모든 지구는 항상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아시겠어요?"

     

     

     여기까지 듣자 바니키스도 상상이 되었다.

     확실히 지구는 이동하고 있다.

     태양 주변을.

     은하 팽대부 주변을.

     

     

     "너... 설마..."

     "그래요. 본래의 의미로 고정시키면, 지구의 중력이나 관성의 법칙 등 여러 가지에서 해방돼요.

     지금의 당신은 이 별의 인력조차 간섭하지 않는 수준으로 고정되어 있죠.

     주행 중의 차에서 물건을 떨어트리면, 벗어난 건 점점 멀어지잖아요?

     아직 이 고유공간이 붙잡아서, 큰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지만..."

     

     샤리아는 키득거리며 유쾌하다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원래는 쓰고 싶지 않았어요.

     박식이란 애초에 사람의 독점욕을 채우는 것이지,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무슨...말을...!"

     "박식은, 좋아하는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있어요.

     이성이나, 친구나, 가족이나. 그런 사람의 아집이 형태를 이룬 것이 이런 띠였어요."

     

     

     샤리아는 "알겠나요?" 라며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시 말해 사랑. 사랑이야말로 박식.

     이 사람을 계속 곁에 두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이어지기 위한 사슬.

     그것이 박식.

     박식이란 다시 말해 애정의 구현.

     사랑이 없으면 쓰면 안 돼요.

     사실 구애행위로 봐도 과언이 아닌걸요.

     본래의 의미로 쓴다면, 티아가 쓰는 편이 올바르겠지만..."

     "아무래도 변태는 고치지 못한 모양이로군."

     

     "............."

     

     샤리아는 싸늘하게 눈을 뜨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바니키스의 몸이 더욱 깊게 파고든다.

     슬슬 공간을 유지되지 못한다.

     

     

     "지구가 공전하는 와중에 고정되면 어떻게 될지...

     모처럼이니, 실제로 체험해보세요."

     

     그리고 공간은 부서졌다.

     너무나 손쉽게.

     빗방울이 약해진 구름 낀 하늘과, 저편에 보이는 견문의 탑. 바니키스의 공간이 파괴된 탓에,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카악ㅡㅡㅡ!?"

     

     다음 순간 보인 것은 푸른 구체였다.

     조금 뒤늦게, 우주공간에 던져졌다고 확신했다.

     

     아니, 다르다.

     던져진 것이 아니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멈춰있는 바니키스를 놓고 간 것은 필연.

     

     

     "바, 박ㅡㅡㅡ"

     

     

     검은 박식을 부르지만, 계속 돌고 있는 지구에는 닿지도 않을 터. 그렇다 해서 지금의 속도로 주위에 떠 있는 부유물을 붙잡기란 어렵다.

     

     그렇게 하는 사이 지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정신 차리고 보니 고정은 더욱 심도를 높여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의식만은 또렷했다.

     안구는 안 움직이지만 시야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인식할 수 있다.

     고정되어서 추위는 안 느껴지지만, 미세하게 소리 같은 것은 들린다.

     

     

     '어이, 잠깐...!?'

     

     

     지구가 천천히 작아진다.

     푸른 지구가.

     이렇게 비교하면, 지구는 항상 움직이고 자신은 정말로 멈춰있음이 실감된다.

     

     바니키스는 그 후로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이 고정을 해제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지구에 산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생각해서, 끝내 절망한 것은 그 후로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리벳은 신중하게 주위를 경계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아, 살아있어?"

     [네...]

     

     

     노아는 작게 떨고 있다.

     눈을 뜬 것은 1분 정도 전이다.

     바니키스의 공격을 받고, 정신이 들었을 대에는 공간이 무너져 있었다.

     

     방금 하늘로 날아가서 별이 된 것은 바니키스일까.

     

     

     [저, 저거, 어떻게 하면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니, 아마 못 돌아와.

     평생 우주를 떠다니게 돼.

     정말 심한 방식이라서, 샤리아 님도 요마 이외에는 절대 쓰지 않았지만..."

     

     야마타노오로치 때에도 쓰는 걸 주저했었다.

     그 정도로 가혹한 기술이라고, 샤리아 자신도 그 자각이 있는 것이다.

     

     

     "아, 리벳~"

     

     손을 흔들며, 샤리아가 미소 지으며 달려온다.

     드레스의 옆구리에 크게 피가 배어있다.

     

     

     "다행이다. 무사했었구나."

     "아니 샤리아 님, 그 상처는..."

     "이건 괜찮아. 벌써 지혈시켰으니까."

     

     정말로 괜찮다는 듯 대답하는 샤리아.

     정신을 잃고 지금까지의 기억은 없다.

     일단 별이 되어버린 바니키스를 보아한, 오의를 쓸 정도로 내몰렸던 모양이지만.

     

     샤리아는 조금 크게 심호흡하고서, 흘끗 전장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여덟 머리가 된 큰뱀과, 탑처럼 굵고 거대한 흑창을 휘두르며 대치하는 빅토르의 모습이 있었다.

     양자를 중심으로 몇몇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역시 밀리는 분위기는 감출 수 없다.

     

     몇 명이 당한 걸까.

     모습이 안 보이는 자가 좀 있다.

     어쨌든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마력은 아직 온존해놓았다.

     [백업]의 박식을 인간에게 쓰는 건 주저되지만ㅡㅡㅡ

     이제 그럴 걸 따질 수 없는 상황이다.

     

     

     "샤리아 님, 이래선 지원이 올 때까지 못 버텨요... 아무리 빅토르 씨가 있어도..."

     

     리벳의 말에, 샤리아는 주저 없이 수긍했다.

     

     

     "그래, 내가 단번에 끝장을ㅡㅡㅡ"

     "끝장을?"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검고 짧은 머리의 남자.

     그것이 샤리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발소리도 흙먼지도 안 났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반사적으로 자세 잡는 샤리아를 놔두고, 거한이 리벳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샤리아는 한발 늦게 반응했지만, 리벳은 아직도 거한을 눈치채지 못했다.

     

     뇌내에서 마언을 영창하여, 온몸을 뒤덮는 형태로 박식을 전개시켰다. 휘두르는 주먹과 리벳 사이에 들어간 것은,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리벳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을 것이다ㅡㅡㅡ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의 위력.

     

     샤리아는 여태껏 맛본 적 없는 압력을 박식 너머로 느끼면서,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여, 이윽고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리벳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해한 것은, 대략 1초 후였다.

     

     

     

     

     "로켓 같네~"

     

     

     비구름 속으로 녹아든 샤리아를 지켜보던 마린한테서 나온 감상은 그것이었다.

     

     

     "아저씨, 저거 어디까지 날아가?"

     "화성."

     "진짜? 바퀴벌레한테 승리하기 전에는 못 돌아오겠네?"

     

     "그렇겠지."

     

     흑발의 거한ㅡㅡㅡ다즈몬드 기라트는 귀를 후비면서, 왠지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방금 날아간 샤리아한테는 일절의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다즈...몬드..."

     

     갑자기 나타난 거물을 시야에 담으며, 리벳은 전율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다즈몬드는 눈앞의 리벳은 보지도 않은 채 전장을 둘러보았다.

     

     

     "...몇 명 부족한데?

     왜 겐사이 할배까지 없는 거냐고."

     "잔챙이가 도망쳐서 쫓아갔대.

     그, 겐사이 할아버지는 손녀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두지 않으면 실금하니까."

     "그랬구나."

     

     납득한 다즈몬드는 따분하다는 듯 머리를 긁고서,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음~"이라고 신음소리를 내고서,

     

     

     "...어쩔 수 없지. 불러올까."

     

     탁.

     굵은 손가락을 튕겼다.

     

     

     "우와 잠깐만..."

     

     마린이 초조해하며 몸을 웅크린다.

     리벳은 움직이지 못했다.

     다즈몬드가 뭔가의 술식을 발동하기 전에, 노아를 송환하는 일에 바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리벳한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하지만 주위는 달랐다.

     

     리벳의 아래에 티아가 있다.

     겐사이와 베르베느도 있다.

     시키가미 코즈미와 비비안도 있다.

     지하로 사라졌을 나인과 로긴스도 있다.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이 모두 모였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타난 본인들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한결같이 당혹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묘한 점은, 다즈몬드의 동료인 겐사이와 로긴스까지 약간 혼란스러워한다는 점이다.

     

     

     "무, 무슨 짓을ㅡㅡㅡ"

     

     약간의 충격을 느끼고서.

     리벳의 의식은 거기서 두절되었다.

     

     

     ◇

     

     

     "갑자기 그러는 거 그만둬 아저씨."

     

     전장을 바라보면서, 마린은 등 뒤의 다즈몬드를 째려보았다.

     

     

     "딱히 네가 어떻게 되는 기술도 아니라고."

     

     "거짓말.

     아저씨는 마술을 너무 대충 쓴단 말야."

     

     그 증거로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있어야 할 언덕이 사라지고, 엄청난 모양의 기복이 생겨나 있다.

     견문의 탑은 변함없지만, 주변의 시가지를 포함한 지형은 점토라도 주물럭거린 것처럼 비틀려있다.

     

     이건 [압축]의 범위를 잘못 쟀다고 보아도 좋다.

     조금만 더 좌표 설정을 잘못했다면 동료를 포함한 거의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이 경우 맨 먼저 피해를 입은 것은ㅡㅡㅡ생각하고 싶지 않지만ㅡㅡㅡ바로 옆에 있는 마린이다.

     

     

     "어쨌든 이걸로 다 모였다. 청소하기 쉬워졌으니 잘 됐지."

     "뭐 그건 그렇지만..."

     "자, 다음은 동료한테 맡기고 어서 가자 마린."

     

     견문의 탑을 향하여 걸어가는 다즈몬드의 뒤를 쫓으면서, 마린은 옆에 서 있던 0호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을 걸었다.

     

     

     "타카츠키 꼬마는 쓸만해 보여?"

     [모체로서는 문제없습니다]

     

     "간이 성건은?"

     

     [언제든 쓸 수 있습니다]

     

     "좋아."

     

     이미 농화도 수중에 넣었다.

     다른 싸움이 어떻게 되든 의식만 성공한다면 마린으로 보자면 만만세다. 최소한 시간을 버는 것은 확실. 아니, 싸우는 녀석들은 처음부터 계획의 진행상황도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마린 본인의 범위로 말하자면 이긴 것과 마찬가지.

     

     

     "이제 끝인가..."

     

     여기까지 오는데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얻은 것은 있지만, 잃은 것은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아쉬운 것이라면 있다.

     지금의 자신을 코린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여동생이 본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아아... 빨리 세계를 없애야 해."

     

     마린은 혼자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는 0호만이,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

     

     

     

     

     뒤집힌 차량 속에서, 모모야마다 모모코는 계속 몸을 웅크리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창문으로 바깥을 보니 포장된 도로가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있다. 이래서는 마치 사막의 모래언덕 같다.

     아니 그것보다도.

     수십 초 전에 일어난 기묘한 현상.

     차량 자체가 뭔가에 끌려가는 듯한 감각.

     잘 보니 경치가 완전 다르다.

     소스케와 이리자키, 세피로트 일행의 모습도 없다.

     아무래도 몸을 지키는 사이 흩어진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따라가지 않는다.

     

     

     "여러분! 무사한가요!?"

     

     

     차내에서 뛰쳐나온다.

     그곳에는, 엉망진창이 된 세피로트의 멤버 대부분이 메이드복을 입은 가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발소리를 눈치챘는지, 티파레트가 모모코에게 시선을 옮긴다.

     

     

     "..! 모모코! 나오면...!"

     

     

     대사를 끝내기도 전에, 티파레트는 뭔가에 맞아서 날아갔다. 핀볼 게임을 하는 느낌으로. 어째서 날아갔는가. 그것까지는 안 보였다.

     

     

     "모모야마다 모모코 님..."

     

     메이드복의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 주먹은 피가 흠뻑 달라붙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크롬의 온몸이 흔들린다.

     망가진 티비 화면처럼 평평하게 늘어나더니, 이윽고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목을 붙잡힌 것은 잠시 후였다.

     손쉽게, 아무것도 못하고 붙잡혔다.

     빠르다는 영역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후의 행동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땀이 솟구치며,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저항은 소용없다고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크롬이 모모코에게 뭔가 행동하려던 순간.

     검은 무언가가 크롬의 스커트의 옷자락을 만졌다.

     

     

     "음ㅡㅡㅡ"

     

     크롬은 뛰어오르더니, 보자기처럼 떠오른 검은 물체에서 거리를 뒀다. 이 마술은ㅡㅡㅡ

     

     

     "마, 마르쿠트 씨..."

     "물러나세요. 그녀의 목표는 당신입니다."

     

     

     요건만 전하고서, 마르쿠트는 검은 유리구슬 같은 물건을 공중에 둥둥 띄웠다. 검은 구슬은 마르쿠트의 등에서 몇 번인가 빙글빙글 돌더니, 일렬로 늘어서서는 단번에 크롬을 향해 발사되었다.

     

     검은 구슬은 총알보다도 빠르게, 크롬에게 육박했다.

     크롬은 그걸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하거나, 혹은 손등으로 쳐냈다.

     

     

     "혼자 온 것은 실수였슴다!"

     

     

     마르쿠트가 추격타를 날리기 전에, 게브라가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오른손에는 시퍼런 나이프가 들려있다.

     

     하지만 칼날을 휘두르는 것보다 빠르게, 크롬은 게브라의 오른손목을 붙잡아 공격을 차단했다.

     그대로 물 흐르는 것처럼 차올린 무릎차기는 게브라의 명치에 정확하게 꽂혔고, 등골까지 그 충격을 제대로 전달시켰다.

     

     그리고 그 공방조차, 모모코한테는 보이지 않았다.

     전부.

     보이는 것은 사람 가은 잔상과, 끊임없이 울리는 바람소리 뿐.

     

     그 와중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피로트가 밀린다는 사실이었다.

     멤버가 움직일 때마다 크로이 반응하여, 손쉽게 선수를 쳐내는 것이 반복된다.

     싸움은 되고 있지만, 승산이 있는 걸로는 안 보인다.

     

     

     "아버지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나요?"

     

     

     크롬은 어느 사이엔가 눈앞에 있었다.

     방심한 것은 아니다.

     그냥, 도망칠 틈이 없었다.

     

     

     "안 옵니다. 그러니 날뛰지 말아 주세요."

     

     손이 뻗어온다.

     크롬의 등 뒤에는, 공중에 떠 있는 세피로트의 멤버들이 보였다.

     

     

     "히익ㅡㅡㅡ"

     

     

     손끝이 닿기까지 머지않았다.

     시야 오른쪽에서, 다섯 손가락이 크롬의 목을 움켜쥐었다.

     

     

     "어이."

     

     이마에 핏줄을 띄운 소스케가, 크롬을 들어 올리더니 얼굴을 지면에 패대기쳤다.

     둔중한 소리가 대지와 고막을 진동시킨다.

     일격으로는 안 끝난다.

     이격, 삼격.

     다시 들어 올리나 싶더니 때려 박아서, 일격마다 크롬의 안면을 아스팔트에 파묻어간다.

     

     공격을 멈춘 것은 오격째였다.

     크롬은 파묻힌 얼굴이 빠지기 전에 몸을 유연하게 비틀어, 두 발목으로 사토의 목을 홀드.

     그대로 하반신을 고속으로 움직여서, 소스케를 망치처럼 박아버렸다.

     

     

     "..............!"

     

     

     양측 모두 머리가 지면에 깊게 파묻혔다.

     모모코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먼저 지면에서 나온 자는 소스케였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일어나서는, 가볍게 목을 꺾어 소리 낸다.

     

     반면 크롬은 일어서서는 조심스레 옷의 먼지를 털고는, 등을 펴면서 소스케를 바라보았다.

     

     

     "사토 님. 여자의 얼굴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답니다."

     "상처가 난 다음에 말하지 그래요."

     

     소스케의 말대로, 크롬의 얼굴은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출혈도 타박상도 없다. 아마 씻어보면 윤기 있는 흰 피부가 보일 것이다.

     

     

     "오늘은 어떤 이유로 당신들의 발을 묶으러 왔습니다. 괜찮다면 잠시 동안 어울려주시겠나요?"

     "좋죠."

     

     소스케의 손목이 스냅을 쓴다.

     그와 연동하는 것처럼, 크롬이 공처럼 날아갔다.

     

     

     "꺄아!?"

     

     폭풍.

     나무들이 삐걱거리고, 풀이 지면에 착 달라붙는다.

     방금 공격의 여파일까.

     어쨌든 크롬에게 한방 먹인 모양이다.

     

     불규칙하게 회전하면서도, 크롬이 절벽에 박히는 일은 없었다. 멋지게 발바닥부터 꽂혀서 충격을 완화시키고, 그 응력을 모은 두 무릎으로 해방시킨다.

     크롬은 마치 로켓 같은 속도로 소스케에게 접근.

     이대로 몸통박치기인가, 아니면 위협인가.

     

     

     "모모코 씨.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그녀를 감싸는 것처럼 서서는, 크롬의 돌진을 받아낸다.

     소스케는 그대로 어깨 부근의 옷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순간이동과 비슷한 기술 때문에 손쉽게 거리를 내주고 말았다.

     

     피아의 차이는 열 걸음.

     한 호흡에 좁히면서 안면을 때려 박아 하늘 저편까지 날려버리자.

     

     먼저 한걸음을 내디딘 자는 소스케.

     그런데도, 먼저 얻어맞은 것 또한 소스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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