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화 식전2022년 02월 12일 13시 49분 43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작성자: 비오라트728x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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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많은 무용수들이 즐겁게 춤춘다.
식전은, 건국신화의 단막극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간 쟈넷은, 숨을 몰아쉬면서 무용수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들이 표현하는 것은, 따스한 양지.
그 옛날, 이 땅은 항상 봄이었던 나라라고 한다.
많은 무용수들의 원의 중심에서 한 예쁜 여성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온화한 바람에 탄복하는 노래를 부른다.
건국신화의 히로인 [에라흐]인 것이다.
"예쁘네요."
플로라가 작게 속삭였다.
"그렇네."
쟈넷은 즐거워하는 플로라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황자는 은룡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어째서 그런 곳에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위험할 뻔했다.
ㅡㅡ내통했다는 것이 되려나?
쟈넷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은룡은 여기에 뭘 하러 온 걸까.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을 터인데.
이윽고, 음악이 바뀌더니 무대도 변한다.
사랑의 노래다.
에라흐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무대 위에서는 두 배우가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서 춤추고 있다.
"대단해."
플로라가 감탄의 한숨을 쉰다.
플로라에게 있어, 사랑은 아직 꿈이다.
적어도 플로라는 그 꿈을 이루었으면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만 칸막이석으로 눈길을 주고 말았다.
ㅡㅡ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황자의 단정한 옆얼굴. 그 눈에 쟈넷이 비치는 일은 없는데도.
미련이 가득한 자신에게 무심코 쓴웃음을 짓는다.
무대는, 마술을 써서 안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갯속에서 흰 드레스의 미녀가 나타났다.
물과 얼음의 신, 바라프다.
에라흐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람이 아닌 화염의 신 퓨르였던 것이다.
바라프는, 그의 부인이다.
ㅡㅡ마술사의 실력을 보일 때네.
쟈넷은 무대 구석에 숨은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기에서는, 배우가 아닌 마술사의 실력이 관객을 매료시키는 시간이다.
바라프는 화나며 길길이 날뛴다.
그러자 무대 위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신이시여."
에라흐는 외쳤다.
바라프의 분노는 빙설산맥을 타고 내려오자, 프리마베라는 동토가 된다.
음악은 얼어붙은 대지를 표현하며 차갑게 울린다.
에라흐는 어린 자식을 끌어안으며 한탄한다.
그러자 무대에, 불 하나가 일어났다.
음악이 격하게 울려 퍼진다.
퓨르의 사자인, 시퍼런 화염을 두른 은의 용 일루전이다.
작년까지는 여기가 쟈넷의 일이었다.
ㅡㅡ훌륭해.
용은 웅대하면서도 섬세하여 아름다웠다.
ㅡㅡ마리아가 아냐? 누구일까?
쟈넷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마술은 마리아의 것이 아니다.
이만한 마술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은 한정되어 있다.
ㅡㅡ설마?
무대 구석에 서 있는 인물을 보고, 쟈넷은 놀랐다.
ㅡㅡ은룡.
은룡이 은의 용을 무대에서 연기하다니, 이게 무슨 농담이람.
쟈넷은, 전의 식전을 떠올렸다.
딱히 지금과의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식전은 아무 일 없이 끝났을 터다.
무대에서는 멋들어진 용이 공중을 날고 있다.
퓨르의 은룡이 얼음의 대지를 녹여가는 것에 맞춰, 무대 중앙에 에라흐의 자식 역할인 청년이 선다.
장대한 음악과 함께, 용은 하늘을 날아 성스러운 화염으로 향한다.
ㅡㅡ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네?
용의 눈이, 화염을 바라본다.
쟈넷은 숨을 삼켰다.
그때 쟈넷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화염의 목소리를, 은룡은 들을 수 있는 것인가.
만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 된다.
하지만, 긴장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용은, 당초의 예정대로 성스러운 화염 속으로 뛰어든다.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무대는 피날레를 맞이했다.
이것이 프리마베라 제국의 건국신화.
관객을 매료시킨 배우들이 인사한다.
여기서부터의 식전은 제왕을 칭송하는 따분한 것이다.
ㅡㅡ신의 화염이라......
이 나라는 성스러운 화염을 손에 넣었지만, 바라프의 분노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빙설산맥에서는 지금도 얼어붙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제왕 자네스는, 성스러운 화염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영토를 넓히고 국민을 공포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ㅡㅡ그건 그렇고, 목소리는 들렸을까?
쟈넷은 마술사들이 앉은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여기서는 은룡의 모습이 안 보인다.
ㅡㅡ지금이라면
일어서려던 쟈넷은, 시선을 느끼고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ㅡㅡ황자?
착각도 환각도 아니라, 황자는 쟈넷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감정은 읽을 수 없지만, 시선은 틀림없이 쟈넷에게 향하고 있다.
ㅡㅡ의심하고 있어?
쟈넷은 다시 앉았다. 등에 서늘한 것이 흐른다.
동요를 숨기면서, 쟈넷은 시선을 성스러운 화염으로 향했다.
창공을 배경으로 타오르는 성스러운 화염은, 평소보다 격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식전이 끝을 고하면, 황족부터 순서대로 회장을 떠나는 것이 관례다.
라니아스가 쟈넷 자매를 마중하러 온 것은, 귀족들이 많이 돌아간 뒤였다.
"홍련의 마술사공."
통로로 나서자, 예상대로 누군가가 쟈넷에게 말을 걸었다.
"무파나 장군. 정말 오랜만이네요."
말을 건 자는, 중년이며 외눈의 남자였다. 머리는 약간 희끗하지만, 다져진 육체는 아직 젊다.
이 남자가 쟈넷에게 말을 걸다니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모두 [예상대로]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잠깐 괜찮겠나?"
"네. 무슨 일인가요?"
"서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다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은연중 암시하자, 쟈넷은 라이나스에게 플로라를 마차로 데리고 가도록 고했다.
무파나는 원형극장의 귀족석 부근에 있는 작은 대기실로 쟈넷을 안내했다.
여기는 경비하는 위병들을 통솔하는 지령실이다.
투박한 의자에 앉으라고 듣자, 쟈넷은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방에 있는 자는, 무파나와 그의 부하라고 생각되는 듬직한 남자들이 4명.
언행은 온화하지만, 안락한 분위기는 아니다.
이 남자는 제국비가 총애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할 말씀이란 뭔가요."
"황자와의 약혼, 사퇴해줬으면 한다."
예상대로의 말이다.
"그렇게 해준다면, 현재의 채굴장의 일이 아닌, 궁정마술사로서 제도에 살 수 있도록 처리해주마."
이것도 전과 같음. 이전의 쟈넷은, 제안을 거절했다.
딱히 제도에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퇴짜를 놓으면서.
그리고는 대화의 자리에서 억지로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절한다 해도 조금 더 이야기를 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제도에서 사는 일에 이점을 느낄 수가 없는데요."
쟈넷은 미소를 지었다.
이전처럼 완전히 거절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황자 본인이 말한다던가 자신의 의지라면 몰라도, 타인의 의도로 파혼할 생각은 없다.
"채굴장의 일이 마음에 든다는 뜻인가?"
"글쎄요. 마음에 드느냐 마느냐 이전에, 제왕 자네스 폐하의 명령인걸요. 그리고 제가 빠진다고 해도 채굴장을 만들 사람이 있을까요."
"그건 귀공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무파나의 눈이 빈틈없이 쟈넷을 바라본다. 쟈넷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궁정마술사의 칭호를 받으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에서 남몰래 연구하게 되는 걸까요?"
나도 참 사람이 나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하고 싶은 일은 말해둬야만 한다.
"뭐 좋아요. 그런데 황자와 저의 약혼, 당신한테 무슨 관계가 있나요? 재상 각하의 부탁이라던가?"
무파나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렇지 않다. 황자는 미묘한 입장이다. 폐하께서는, 황자의 인기를 경계하고 계신다. 귀공 같은 불씨를 품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제비님께선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황비님께서? 저랑 황자님과의 약혼은, 폐하께서 찬성하고 계신데요?"
황자는 몰라도, 제왕 자네스는 쟈넷과 황자의 결혼에는 적극적이었다.
"폐하께서는, 홍련의 마술사라는 불씨를 황자가 어떨게 다룰지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계신다."
"그런가요......"
분명하게 반역의 의사가 있는 여자를 들이고서, 그럼에도 제왕의 밑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제왕 자네스는, 하리스를 시험해보려는 것일까.
표면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리스는, 제왕 자네스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다.
제비 아라바는, 애초에 자네스의 형의 약혼녀였다. 형이 급사하자, 자네스에게 부탁해서 시집을 갔다.
일설로는, 자네스의 형은 암살당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소문일 뿐이며,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래서, 제비님은 절 황자에서 떨어트리려는 건가요."
쟈넷은 싱긋 웃었다.
"약혼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남자한테 시집간 분이어도, 자식은 귀여운 모양이네요."
"무례한."
"어머, 실례해버렸네요."
쟈넷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네요, 아버지를 한번 만나게 해 주신다면, 생각해도 좋아요."
"뭐?"
"자식을 귀여워하는 제비님이라면,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딸의 마음도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스스로도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쟈넷은 말을 이어나갔다.
"딱히 힘든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단지, 아버지를 면회하고 싶을 뿐인걸요."
기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쓸만한 것은 뭐든 쓰자.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목숨이 단축되는 일이 생긴다 해도, 후회는 안 한다.
쟈넷은 기죽는 일 없이, 무파나에게 웃어 보였다.
"한번, 고려는 해보마."
무파나는 무뚝뚝한 얼굴인 채 그리 말했다.
"감사드려요."
쟈넷은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조금, 뭔가가 변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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