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수중에 있는 서류를 확인해보니, 이 일은 분명 로사가 담당하고 있는 일이었다.
문 너머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비스, 혹시 나에게 일을 맡긴 걸 잊어버린 거야? 그렇게나 매일 확인했는데도?"
매일, 확인?
그랬던 것이다. 로사는 매일매일 집요할 정도로 일을 확인을 해왔다. 그녀가 열심인 것은 알았지만, 그게 너무 귀찮아서 어쩔 수 없이 술의 힘으로 친구에게 투덜대고 말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에 쥔 서류는 영지 경영에 관한 것이었다. 저택을 관리하는 백작부인이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확인해야겠다 싶어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확인해보니 확실히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업무는 내가 담당하고 있었다.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힘든 일이었다.
왜 이런 중요한 일을 로사에게 맡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급히 존을 불러 로사가 이 일을 맡게 된 경위를 물었다.
"1년 전쯤이었을까요? 나으리께서 몸이 안 좋아졌을 때 마님에게 '잠깐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로사에게?"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내 말에 존은 당황했다.
"매일 마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ㅡㅡ오늘 이 일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일의 이 일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런 식으로 말해도 알아듣겠냐고!"
"예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로사도 존도 설마 내가 일을 부탁한 것을 잊어버린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내가 대신한 일을 보고하고, 나에게 일의 지시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어려운 일을 로사가 대신해 준 덕에 내 시간이 늘어나 사교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시간이 생긴 것은 업무에 익숙해져 능력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밤늦게까지 일을 끝내지 못하여 시간을 들이는 로사를 마음 한구석에서 얕잡아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몸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도 없어서, 최근에는 그녀의 침실도 멀리하고 있었다.
"다 내 탓이잖아......"
지금 당장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존이 말렸다.
"나으리, 이 일은 서둘러야 합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셔야합니다."
그랬었다. 로사에게 맡겼던 일의 오늘 분량을 끝내야만 한다.
나는 서류를 훑어보면서, 이 일이 끝나면 바로 로사에게 사과하러 가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했는데도 업무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역시 이 시간에 로사를 만나러 갈 수는 없다. 로사를 만나는 것은 내일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일에 쫓기며 일주일이 지났다.
겨우 일이 끝나고 로사의 방으로 향하자,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로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 화려한 색의 드레스를 가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데이비스,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묻는 로사의 표정이 밝고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로사, 할 말이 있어."
평소에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던 로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래요? 나는 지금부터 다과회라서."
미안하다며, 로사는 문을 닫으려 했다.
"자, 잠깐만요! 중요한 이야기야!"
"공작부인께서 초대하신 다과회야. 안 갈 수는 없어."
"하지만 ......"
물러서지 않는 나를 향해, 로사는 "오늘은 무리야. 다음부터는 미리 약속을 잡고 나서 와."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 말에, 나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로사가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상대하기 귀찮아서 "다음부터는 약속을 잡고 왔으면 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로사는 슬픈 표정으로 "알았어."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같은 말을 들은 나는, 슬퍼하기는커녕 로사에게 화가 났다.
"우리는 부부잖아! 왜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지 않는 건데!?"
로사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당신은 왜 지금까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지 않았어?"
그 말은 나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궁금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건 ......"
말문이 막힌 나에게, 로사는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의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