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래 단순한 무대장치에 불과했던 것처럼, 니드호그도 기구로서는 단순한 장치일 뿐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신의 시선을 인식하고 자아를 획득함으로써 존재 자체가 변모하고 있지만 ......].
[그래도 얻은 힘을 주어진 사명을 위해 사용할지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루시퍼는 그것을 선택했고,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이미 그 취지는 들어서 알고 있으며, 자유롭게 살라는 말을 받았다. 아몬도 그렇고 네놈도 그렇고, 나는 친구는 얻었지만 동료는 얻지 못한 모양이군]
[미안하다, 루시퍼. 그러나 나무를 옮기려는 벌레들이,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씨앗들이 무감정하게 멸망당하다니 ...... 그 결말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라니 나는 견딜 수 없구나. 세상의 멸망에 맡길 만큼 나는 강인하지 못했다. 연약하고, 현명하지 못했다]
아아, 그렇구나.
세상을 멸망시킬 종말 장치로 만들어졌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루시퍼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끝장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니드호그는 탈출선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내가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민폐일지도 모르지만]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왜냐하면 저희는 세상을 멸망시키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애초에 당신이 역할을 다할 일이 없는 편이 낫잖아요?"
[그런, 가...... 그 말을 들으니, 다행이다]
그렇게 니드호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느새 마그마 갑옷을 벗어놓은 유트였다.
"저 녀석들 괜찮아?"
"네? 뭐가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본다.
어느새 세계수의 밑동으로 이동한 유이 양과 린디가, 곤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
"안 되겠어, 수액이 멈추지 않아."
"린디 씨, 이건 역시 너무 많이 벤 것 같아요."
[어어어어어어어이 어떻게 세계수에 상처 낸 거냐 네년들!!! 원래 새어 나오는 수액만으로 만족하지 않은 거냐!]
당황한 나머지 날개를 펄럭이며 니드호그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무심코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 소녀라면 세계수보다 더 고위인 것은 당연하니까].
"그, 그런가요......"
어렴풋이 모두 깨닫고 있지만.
린디 정말로 괜찮을까나......
◇
무사히 수액...... 아니지. 초콜릿을 손에 넣은 후.
지친 몸을 이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때였다.
"그러고 보니 마리안느는 누구한테 초콜릿을 줄 건데?"
로이가 갑자기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녀석, 이 말을 듣기 위해 걸음걸이를 조절해 나와 함께 맨 뒤에서 걷고 있었구나.
"네네, 당신 몫도 만들어줄게요."
"가장 화려하게 만든 것은?"
"이 녀석 ......"
혀를 내두를 뻔했다.
자신이 최고가 되는데 너무 신경 쓰잖아.
그야 가장 잘 만든 건 너한테 주려고 했지만, 왠지 화가 나기 시작했어.
"글쎄요, 고민되네요. 밸런타인 초콜릿,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좋지 않아, 아주 좋지 않아."
대답은 정말 빨랐다.
고개를 흔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우선이니까 ......"
"멋대로 우울해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스스로 분출한 질투심 때문에 스스로 우울해하는 모습, 보고 있는 나로서는 재미있다.
그러면 당일날 얼마나 기뻐할지도 눈에 선하다.
기대가 되네.
초콜릿을 건넸을 때 로이의 반응을 상상하자,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밸런타인데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초콜릿을 건네줄 때는 상황도 신경 쓰고 싶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초콜릿을 건네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폐허가 된 왕성 안에서, 지옥처럼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상실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후회로 가슴이 찢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미래를 믿느라, 나쁜 상상을 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