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날에 긴장해서 거의 잠을 못 잤다. 왜냐면, 이 약혼에 실패하면 나는 수도원에 가기로 결심했으니까. 긴장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봐, 괜찮아!?"
어깨를 흔들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일라이자 양 맞지!?"
"아, 네"
눈앞에 있는 청년은 마치 평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었어! 왜 안 돌아갔어! 안 돌아갈 정도로 몸이 안 좋은 거야?"
"저기......?"
창밖에는 해가 기울어져서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저기, 사실은......."
솔직히 사정을 설명하자, 청년은 당황해했다.
"뭐!?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기분이 좋았던 바람에 그냥 졸고 있었다고!? 거짓말이지, 너 정말 백작영애 맞아?"
청년의 말이 내 가슴을 푹 찌른다. 이 약혼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애초에 맞선 상대인 월스 님조차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까.
"월스 님은 돌아오셨어요?"
내가 그렇게 묻자, 청년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내가 ...... 월스야."
"네!?"
보, 본인이었나요. 월스 님을 사교계에서 본 적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남의 집에서 졸고 있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으니, 5번째 약혼은 지금 당장 거절당할 것 같네요.
하아...... 저질러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
수도원에 들어가면 젊은 남자를 만날 일도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 월스 님의 얼굴이라도 기념으로 잘 봐두도록 하죠.
어머머, 눈빛은 날카롭지만 얼굴이 아주 잘 다듬어졌네요. 몸도 듬직해서 제 스타일이에요.
무엇보다 졸고 있는 저를 보고 몸이 안 좋은 건 아닌지 걱정해 주시다니, 정말 다정다감한 분이셔. 약혼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워라.
욕망 섞인 시선으로 월스 님을 계속 관찰하고 있는데, 입이 조금 찢어져 피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왼쪽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 같기도 하다.
"어머 큰일 났네!"
나는 소매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월스 님의 입가에 대었다. 메이드는 "그런 곳에 손수건을 넣지 마세요"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여기에 넣어두면 아주 편리하다. 물론 이 행동에 놀라는 월스 님.
"방금, 손수건을 어디서 꺼냈어?"
"그런 것보다, 여기 피가 나요."
"아, 그거, 아까 아버지한테 맞아서......"
"왜요?"
월스 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내가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당신이 이 집에서 도망칠 줄 알고 그랬지."
"도망이요?"
"지금의 상황을 모르겠어!? 당신은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이유만으로 행실이 나쁜 나와 강제로 결혼을 강요당할 뻔했다고! 게다가 차기 후작인 형과 달리, 나는 남작이 될 수밖에 없는데! 당신, 속고 있는 거라고!"
"아뇨, 속지 않았어요."
"아니, 속고 있잖아!"
"아니요, 정말 속지 않았어요. 저는 약혼남이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에요."
눈을 크게 뜬 월스 님은 "뭐? 이렇게나 예쁜데?" 라고 중얼거리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4번이나 약혼을 거절당했어요."
"네 번이나! 왜?"
"그건 제가 알고 싶어요."
월스 님께 그동안의 일을 말씀드리자, 월스 님은 팔짱을 끼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뭔가 비밀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럴까요? 제가 남자에게 미움을 받기 쉬운 성질인 것일지도 몰라요."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그렇게 단언하는 월스 님. 아까 예쁘다고 말씀해 주셨으니, 조금 기대해도 되려나?
"어쨌든, 당신은 약혼자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거지?"
"네, 월스 님과의 약혼도 거절당하면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려고요."
"수도원! 그건 안 돼! 그럼 내가 잠시 동안 당신의 약혼남이 되어 줄게."
"정말요!?"
"그래, 그동안 당신이 약혼남들과 헤어진 이유도 알아봐 줄게. 그러면 나한테 억지로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지?"
"딱히 억지는 아니지만요 ......"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월스 님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계속 약혼을 거절당하는 이유는 알고 싶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우리의 약혼이 성사되었다.
그 후 월스 님은 정말로 내가 약혼을 거절당하는 이유를 알아봐 주셨다. "당신에게 보고할 것이 있다"며 정기적으로 외출을 권유해 주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