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20 크레이그의 부탁
    2024년 01월 03일 02시 16분 28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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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제니가 그랑벨 후작가를 방문하고 크레이그와 유제니와의 약혼이 이루어진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라이오넬과의 점심을 마친 에디스가 부엌으로 빈 식기를 옮기고 있는데, 옆에 나타난 인물이 그녀의 손에서 빈 식기가 담긴 쟁반을 슬쩍 빼앗아 갔다. 놀라서 에디스가 옆을 보니, 보라색의 밝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크레이그 님?"

    "항상 오빠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줘서 고마워, 에디스. 이건 내가 저기 부엌까지 가져다줄게."

    "괜찮으세요? ......그럼. 고맙습니다."



     크레이그는 에디스가 그랑벨 후작가에 온 후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가끔씩 말을 걸어주었다. 밝고 여유로운 크레이그와 친해지는 데는 에디스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디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크레이그는, 쟁반에 담긴 두 사람 분량의 빈 식기를 바라보며 감개무량해하며 중얼거렸다.



    "그 형이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수 있게 되었을 줄이야. 한때는 식욕도 많이 떨어졌었는데 ....... 역시 네가 항상 형의 곁에 있어줘서 그런가 봐. 네가 만들어 주는 음식은 다 맛있다고 형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그랬나요? ...... 고맙습니다."



     라이오넬은 최근 들어 죽 이외의 음식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에디스는 회복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라이오넬을 위해 소화가 잘되고 영양이 균형 잡힌 약초를 섞은 메뉴를 생각하는 것이 매 끼니마다 기대되었다. 라이오넬은 매번 부끄러워하지 않고 에디스의 요리 솜씨를 칭찬해 주고 있다.

     하지만 설마 라이오넬이 동생인 크레이그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에디스는 몰랐다. 수줍은 듯 살짝 붉어진 에디스를 보며 크레이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솔직하고, 다정하고, 근사한 여자야. 형에게 있어 너는 이상형 그 이상, 갑자기 찾아온 신의 선물 같은 존재인 것 같아. 오빠는 너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네."

    "그, 그런가요......"



     에디스는 점점 더 뺨에 피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금은 라이오넬이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곁을 지키고 있는 자신이 비교적 좋게 보이는 것 같다고 냉정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라이오넬이 회복될 때까지 에디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고, 에디스의 가슴속에는 라이오넬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디스는 그런 자신을 경계하기도 했다.



    (라이오넬 님이 회복되셨을 때,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더 적합한 귀족가의 영애가 많을 거야. 그때는 내가 그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야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라이오넬이 에디스에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무심코 가슴이 뛰는 자신에 대해 당황스러웠던 에디스였다.



     크레이그는 가만히 에디스를 바라보며,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내 약혼녀가 된 유제니가 며칠 전에 이 집에 왔었는데. 너는 그녀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았어?"



     크레이그는 귀족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에두르는 말투가 아니라 간결하게 말을 한다. 평민으로 자란 에디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친근감을 느끼며 그의 직설적인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분이세요. 게다가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였어요."

    "...... 그래, 그럼 다행이다."



     크레이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제니가, 원래는 내가 아니라 오빠랑 약혼할 예정이었다는 걸 에디스도 들었어?"

    "네, 라이오넬 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형한테서 이미 들었구나."



     크레이그는 에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형이 병에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제니는 약혼할 상대를 나로 바꿨어. 형이 앓은 병은 생명을 위협하는 중병이었기 때문에 그런 유제니의 선택에 이 가문에서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면, 어릴 때부터 약혼할 예정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가장 형을 도와야 할 시기에 약혼할 상대를 나로 바꿨다면서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이 가문에서 오래 일한 하인들도 포함해서 말이야 ...... 형은 예전부터 인기가 많았으니 후자가 훨씬 더 많을 것 같아."

    "...... 그랬군요."

    "하지만 이 일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유제니가 아니라 나다. ...... 오랫동안 그녀를 짝사랑해 온 내가 형 병에 걸려 슬픔에 잠긴 그녀를 보고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마음을 그녀에게 말해 버렸으니까."

    "......!"



     예상치 못한 크레이그의 말에, 에디스는 눈을 의심했다. 크레이그는 약간 괴로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유제니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나쁜 건 바로 나지. 형이 병석에 누워있을 때 그래서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형에게도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어. 다만 실제로 형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 네가 본 것처럼 여동생 아체도 저런 느낌이라서."



     크레이그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에디스를 바라보았다.



    "유제니는 형의 약혼녀인 너를 만나고 네게 호감을 갖고 있어. 이 집에 온 지 얼마 안 된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할 수만 있다면 네가 유제니의 편이 되어 주면 좋겠어."



     에디스와 함께 부엌에 도착한 크레이그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에디스에게 건넸다.



    "이건 유제니가 네게 보낸 편지인데, 차 한 잔 하자더라. 너와 둘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어. ...... 괜찮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답장은 나에게 주면 돼."

    "...... 네, 알겠습니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에디스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들고, 에디스는 크레이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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