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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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2월 17일 22시 49분 23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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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람은 화가 났다.

     그 불 같은 분노에, 오딜롱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아니, 결코 그런 뜻은......"



     미레이유는 그 대화를 들으며,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사실 임신한 것은 아니다. 성녀의 힘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지어낸 것뿐이다.

     만약의 사태가 생기면 유산했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아이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ㅡㅡ전하"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제국의 성녀가, 볼프람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넨다.



    "임신했을 때 기둥을 세우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랍니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는 분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 다정한 목소리에, 미레이유는 마음속 깊이 떨었다.



    "미레이유 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ㅡㅡ설마. 그럴 리가 없다. 죽었을 거야. 죽였을 거야.



    "저도, 협력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 저는 다시는 그 나라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던지라."

    "왜, 그런 맹세를......."



      오딜롱의 물음에, 제국의 성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쪽의 미레이유 님께 맹세했습니다."



     가늘고 유연한 손으로 스스로 베일을 벗는다.

     드러난 것은 아름다운 얼굴과 깊은 푸른 눈동자.



    "오랜만이네요, 미레이유 님"

    "...... 엘레나 ......"





    ◆◆◆





    "살아 ...... 있었어 ......?"

    "예.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미레이유의 질문에, 엘레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엘레나는 여러 번 죽을 뻔했다.

     낯선 땅에서 떠돌아다니며 목숨을 위협받는 나날이었다.

     그때 도움을 준 것이 볼프람이었다.



     성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엘레나를 구해주고서 2년 동안 곁을 지켜주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엘레나는 제국에 기둥을 세웠다. 여러 개나.



     볼프람의 눈이 엘레나를 바라본다.



    "엘레나, 무슨 뜻이지?"

    "저는 왕국에서 태어났답니다. 고아였던 저를 미레이유 님이 데려가셔서 시녀로 고용해 주셨어요."

    "그랬는가 ...... 네게 그런 과거가 있었을 줄이야."

    "네, 맞아요. 미레이유 님은 저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어요. 하지만 저는 죄를 짓고 말았어요."

    "죄?"



     볼프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졌다.



    "자비로우신 미레이유 님은 평소 같으면 처형당했을 저를 추방으로 용서해 주셨어요. 그때 다시는 왕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답니다. 죄인의 몸으로 그 맹세를 어길 수는 없습니다."



      오딜롱이 고개를 들었다.



    "죄 따위는 물론 용서해 주마! 어때, 미레이유."

    "............"



     미레이유는 말없이 얼굴을 숙인다.

     볼프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ㅡㅡ엘레나,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제 입으로는, 도무지."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미레이유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을 알기에, 엘레나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아의 말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미레이유 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거나, 오딜롱 전하께서 알아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가 힘을 보태드릴까 해요."



     미레이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ㅡㅡ힌트는 충분히 드렸을 거라 생각해요. 질문이 있으면 대답해 드리지요."



      오딜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 당신은 언제부터 성녀의 힘에 눈을 뜬 거지?"

    "글쎄요. 철이 들 때부터요."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엘레나는 입을 열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딜롱이 다음으로 시선을 돌린 곳은 왕태자비 미레이유였다.



    "...... 미레이유. 사랑하는 너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네 입으로 말해줄 수는 없을까?"

    "............"



     미레이유는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그 내면에서 타오르는 분노는 엘레나도 느낄 수 있었다.



    "ㅡㅡ이, 이 배은망덕한! 주워준 은혜를 잊어버렸어!?"



     미레이유의 분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성녀에게 무슨 폭언이냐! 자기 입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양이군."



     격분한 볼프람의 목소리가 미레이유의 분노를 잠재웠다.

     미레이유는 크게 몸을 떨고는, 고개를 숙여 몸을 움츠렸다. 발밑이 덜덜 떨리고 있다.



    "죄송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아니라! ㅡㅡ미레이유, 어서 사과해. 지금 당장 성녀님께 사과해라!"



      오딜롱이 필사적으로 말을 걸었지만 미레이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분노, 자존심, 방어, 두려움.

     그것들이 미레이유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엘레나가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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