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전의 기억을 좀 더 빨리 떠올렸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지금은 단죄 중. 게다가 지금 당장 다리아에게 단죄를 당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어어, 어떡하지 ......)
계속 옆에서 걱정해 주는 데이비스에게는 이제 '시끄러워, 바보 왕자. 닥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바보 왕자가 약혼녀 다리아를 소중히 여겼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
마리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각오를 다졌다.
마리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데이비스의 손을 뿌리치고,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숙녀의 예의를 갖췄다.
지금까지의 마리는 자세가 흐트러져 제대로 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본인은 '나는 성녀니까'라며 예의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마리가 자세를 바로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자,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좋아!)
끈적끈적하게 붙어있던 데이비스와 거리를 둔 마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당기며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다리아 님. 그동안 정말 죄송했습니다."
다리아의 진홍색 눈동자가 크게 뜨인다. 옆에서 데이비스가 "마리,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다.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까지의 마리는 늘 말투가 어눌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였는데, 갑자기 어른스러운 말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리석은 진실의 사랑에 미쳐있는 데이비스 역시 마리의 이상함을 알아차린 듯하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데이비스를 바라보았다.
"데이비스 전하,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마, 마리? 무슨 일이야? 다리아, 네 탓이구나!?"
갑자기 다리아의 탓으로 돌리는 데이비스를 보고, 마리는 '왜 저러는 거야. 닥쳐, 멍청아!'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리아 님 때문이 아니랍니다."
그래, 다리아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마리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죄를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자리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는 없어. 그렇다면......)
마리는 소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저는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답니다."
마리는 장내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신의 의지였습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 속에서 다리아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다리아의 표정을 보니, 마리의 말을 조금도 믿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의 저의 행동은 모두 신의 시련이었답니다."
데이비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데이비스뿐만 아니라, 기사단장의 아들, 재상의 아들, 다리아의 남동생인 공작영식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마리는 '당신들, 미래가 약속되어 있고, 저렇게나 착하고 예쁜 약혼녀가 있는데 무슨 불만이었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다 주어져서 너무 완벽하고 순조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어리숙한 마리를 이용해 자극적인 비일상을 맛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순간의 방황이며 그들에겐 장난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많은 여성들에게 상처를 입힌 불장난의 대가는 비싸다.
(물론 나도 같은 죄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마리는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
다리아의 "신의 뜻인가요?"라는 물음에, 마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성녀인 저에게 시련을 주셨어요. 그리고 그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고위 귀족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었죠."
데이비스는 "마리?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고, 마리도 [그렇군요. 저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성녀라는 것을 이용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악행을 신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이 들통나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에 온몸이 떨리고, 마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신께서는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솔직히 이 데이비스가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불안해할 것 같다.
"제게 주어진 사명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시험하고,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