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면, 괜찮으니....... 잠시만 이야기할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가만히 들여다보니,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다.
그런 일이냐고, 마르셀은 생각했다.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마르셀은 말했다.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없어. 게다가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다른 여자와 둘이서만 있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럼 이만 실례할게."
"아, 잠깐만요 ......"
올리비아와 만나고 있는 사이에도 사실은 몰래 다른 아가씨 몇 명과 동시에 사귀고 있던 마르셀이었지만, 얼핏 보기에 정당한 이유를 말하면서 돌아서서 카트린나의 앞을 떠나갔다.
다만, 올리비아를 제외한 다른 아가씨들과는 왜 요즘 금방 자연 소멸하는 걸까. 그런 작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걷는 동안 그 생각은 금방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그를 붙잡으려는 카트리나가 손을 뻗은 끝에 있던, 자신의 등뒤에 서 있는 존재를 확인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
"어머, 마르셀 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로부터 2년 후, 마르셀은 공허한 눈빛으로 신관이 된 카트리나를 찾아갔다.
화려하게 놀며 학교 생활을 즐겼던 마르셀이었지만, 학교 졸업 후 그는 가파른 내리막길처럼 비참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모처럼 왕궁에서 좋은 직장을 찾았는데, 어째선지 가는 곳마다 문제가 연이어 터졌다. 결국 부정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ㅡㅡ부정을 눈치챘으면서 눈감아준 그도 문제였다ㅡㅡ 곧 해고당하고 만다.
이유가 이유인 만큼 무마도 불가능했고, 다른 직장을 구할 수도 없이 가족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간신히, 이거라도 하라는 식으로 던져준 가업의 말단 일을 도와주면서 어떻게든 당장의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차를 타려다 말에게 뒷발로 차이고, 겨울 낚시를 하러 가면 얼음이 깨져 영하의 호수에 빠지고, 산에 오르면 식인곰을 만난다. 그런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밖을 걷다가 새똥이 머리에 박히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원래 낙천적인 성격의 마르셀이었지만, 역시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에게 찾아왔던 수많은 좋은 조건의 혼담들이 썰물처럼 끊어지고 있었다.
애타게 올리비아에게 약혼을 청하자 "저는 당신과 사귈 생각은 없어요"라는 냉랭한 말투로 거절당했다.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마르셀은, 그래도 어느 귀족 아가씨를 잡을 수 있을 것이며 사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해했다.
하지만 처음엔 마르셀이 가볍게 웃기만 해도 볼을 붉히던 아가씨들은 어째선지 이후 겁에 질린 듯 그를 피하며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마르셀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카트린나의 얼굴이었다.
신전 입구에서 쫓겨날 뻔한 마르셀은 우연히 그때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카트린나가 말을 걸어준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카트리나를 보며 마르셀의 마음에 희망의 빛이 비쳤다.
(이건 아직 가능할 지도......)
눈앞에 있는 카트린나는 학교에서 봤을 때 마르셀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워졌다. 짧아진 앞머리 아래에서 의외로 아름다운 긴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고급스러운 목소리 톤에는 차분함과 자신감이 묻어난다.
횡재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가운데, 마르셀이 말을 꺼낸다.
"오랜만이야, 카트리나. 너무 예뻐져서 놀랐어. ...... 사실 요즘 운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왔어. ......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거든."
"이상한 일이라니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마르셀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어야 할 집에서 물건이 움직이거나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하고. 그 밖에도, 왠지 모르게 ....... 나, 저주라도 받은 걸까. 네 신관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리고 예전에 네가 학원에서 말을 걸어왔을 때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미안했어. 지금은 사귀는 여자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 ......"
마르셀은 최대한의, 아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카트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꾹 다물더니, 마르셀의 뒤를 가리켰다.
"계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