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24년 01월 18일 23시 09분 50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작성자: 비오라트728x90
"에밀리. ......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너와의 약혼을 파기해 줄 수 있을까?"
겸연쩍은 듯 눈을 내리깔고 있는 터너를, 에밀리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짧지 않은 관계였지만, 끝날 때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어릴 적부터 가문끼리 약혼을 하여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터너에게,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터너 님, 잘 알겠습니다. 애초에 터너 님의 가문이 더 높으시니 제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는걸요....... 일단 사정을 여쭤봐도 될까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찾았어. 그녀는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지만, 똑 부러진 너와는 달리 약하고 섬세해서 내가 보호해 줘야만 해. 그렇게 강하게 느꼈어."
어딘지 모르게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는 터너를 향해, 에밀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머나, 그건 대체 몇 명째일까요?"
"음? 방금 무슨 말 했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밀리는 작은 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셨군요. 이미 부모님께는 말씀드렸나요?"
터너의 얼굴에 분명한 동요가 나타났다.
"아니, 아직 안 했어. 너에게 먼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이제부터 설득해야지. 그리고, 물론 위자료는 꼭 지불할게. 내가 너에게 준 약혼반지도 위자료의 일부로 써줘."
에밀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전 그가 선물한 왼손 약지에 반짝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힐끗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 주제넘은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상대방의 신원은 확실한가요?"
터너는 화가 난 듯이 에밀리에게 되물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 물론 그녀는 평민이며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은 아니지만, 그게 어쨌다고?"
에밀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과 만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평안하세요."
마지막으로 터너에게 우아한 인사를 건네며 빙글 돌아선 에밀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터너는 에밀리의 곧게 뻗은 등과 윤기 나는 금발이 빛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에밀리를 떠나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 모습을 배웅했다.
***
에밀리가 저택에 돌아오자 오빠 제이크와 그의 절친한 친구 히스가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에밀리, 어서 와. 오늘은 좀 늦었네?"
"방금 돌아왔어요, 오빠....... 방금 전, 터너 님께 불려 나갔다가 약혼 파기 통보를 받은 상태랍니다."
"뭐라고!?"
에밀리를 끔찍이 사랑하는 제이크의 얼굴에 분노가 떠오르자, 히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 제이크, 너는 아무리 그의 가문이 네 가문보다 더 위라 해도 에밀리를 그 사람한테 시집보내는 건 아깝다고 말했었잖아?"
"뭐, 물론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귀여운 에밀리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애초에 어린 터너가 에밀리에게 첫눈에 반한 것을 계기로 했던 약혼이었다. 터너가 부모에게 부탁해 에밀리와 약혼을 하게 된 것이다. 에밀리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약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너에게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에밀리의 모습을 보아왔던 만큼, 제이크는 터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변덕스러운 터너의 곁에 여자의 모습이 보여도 참을성 있게 견디는 에밀리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런 제이크의 걱정과는 달리 밝고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 이제 다 끝났어요. 저는 납득했으니까요. 게다가 히스 님이 운영하시는 흥신소를 통해 터너 님의 바람을 밝혀내기도 해서, 드디어 그에게 정을 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참이니까요."
"그럼 괜찮지만....... 히스, 너, 별난 사업도 하고 있었네?"
"뭐 그래. 장남인 너와 달리, 나는 차남이라 집안을 물려받을 수 없어. 내 사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
히스는 최근 들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업가 중 한 명이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흑발에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남인 그를 노리는 아가씨들도 많다고 한다. 본인은 그런 아가씨들에게 전혀 무관심한 지, 그의 주변에 여자는 없었지만, 오래 사귄 절친의 여동생인 에밀리를 예전부터 좋아했었다.728x90다음글이 없습니다.이전글이 없습니다.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