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 27부 236화 돼지에게 주는 선물 From 로리에
    2023년 03월 30일 10시 32분 27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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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2월 25일은 여신강림제다. 여신이 이 세상에 내려온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 전야제인 12월 24일부터 25일까지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성대하게 축하하는 것이 관례이며, 속칭 '신성한 6시간'이라 불리는 24일 21시부터 25일 3시까지의 6시간 동안 아이 만들기를 하면, 여신의 축복을 받아 튼튼하고 건강한 남자아이를 임신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9월생들이 꽤 많다. 다들 여신의 가호를 받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세상에도 역시 강림제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과 24일 밤 착한 아이의 침대로 산타클로스가 찾아온다는 전승이 존재하여, 다시 한번 산타의 위대함을 느낀다고 호크가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12월의 초입.

     로리에는 호크에게 줄 강림제 선물을 사기 위해, 연일 눈발이 흩날리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붐비는 겨울 거리를 걷고 있다.

         ◆◇◆◇◆

     

     강림제를 싫어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계속, 싫어했습니다. 무언가를 즐기고 들떠 있을 때일수록 사람은 쉽게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 강림제는 일 년 중 가장 암살하기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명상을 하면 기억이 납니다. 위조한 초대장으로 어떤 남자에게 접근하거나, 가짜 신분으로 강림제 파티에 위장해 사람을 죽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강림제 파티를 즐기던 아버지의 목숨을 멀리서 저격으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앗아가고,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젊은 부부를 무고한 아내와 함께 총으로 쏴 죽이고, 산타클로스가 준 선물을 무심코 부모에게 보여주러 간 아이들에게 부모의 독살된 시체를 선물로 준 적도 있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고 배웠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라고 배웠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중죄인이었고, 처형당할 명분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저라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왕실 직속 비밀 첩보부대 U3(언더 쓰리). 그 꼭두각시인 우리들은, 정의의 칼날 그 자체라고 배웠습니다. 갈 곳 없는 고아였던 우리를 주워준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남몰래 더러운 일에 손을 대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로리에!]

     그것이 이 나라의 정의라고 해도, 우리가 해온 일이 살인인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저 도구는 마땅한 분에게 유용하게 쓰이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의의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각인되었습니다. 자기 의지로 사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 계속.

    [네가 여기 있고 싶으면 계속 여기 있으면 되고,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 가면 돼]

    [있잖아. 도구라는 건, 그걸로 뭔가를 한 사람에게 책임이 생기는 거야. 내가 칼을 써서 누군가를 찔렀는데, 실제로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건 이 칼이니까 나는 무죄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통할 리가 없잖아?]

     생각해 보면 저도 많이 달라졌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역시 도련님을 만난 뒤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골드 저택에 잠입한 해의 강림제는 정말 끔찍한 것이었으니까요.

     아직 어린 마리 아가씨를 난방도 안 되는 창고에 가둬놓고, 그 혐오스러운 돼지 부자는 거금을 들여서 마련한 반라의 미녀를 시중들며 술에 취해 주지육림. 어쩔 수 없는 혐오감 때문인지, 아니면 예전의 내 처지가 겹쳐서인지, 몰래 방한용품을 아가씨에게 전달한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있고 싶다고.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당연하게 인간 취급을 받고, 그저 로리에로, 일개 메이드로 지내는 날들은 얼어붙은 제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저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도구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릴 정도로 사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 가슴의 죄책감에 짓눌릴 것 같았습니다.

     도구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한 번 도구가 아니게 되어 버리면...... 싫든 좋든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비도덕적인 일들을 마주하게 된다. 아,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일까요. 내게는 그것을 두려워할 자격조차 없는데.

    [네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우연이네, 나도 그래. 나도 손이 새빨갛게 물들었거든]

    [오히려 사리사욕을 위해 죽이는 우리 쪽이 더 악랄한 것 같은데]

     호크 도련님. 자신의 나약함도, 추함도, 어리석음도, 슬픔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어둠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 저에게 사람으로서의 자리를, 자신의 소임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 끝에 답을 내기 위한 시간을 주신 분. 나의 희망의 별.

     부디, 부디, 계속 빛나세요. 아무리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 앞에 닥쳐온다 해도, 우리가 바라본 어두운 밤하늘의 단 하나뿐인 별빛을 잃지 않도록.

         ◆◇◆◇◆

     지난 며칠간 고민 끝에 제가 구입한 것은, 베개였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베개가 좀 높다고 투덜대던 기억이 떠올라 다행입니다. 도련님이 옷을 갈아입거나 방의 침대를 정리할 때 높이를 미리 측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소재는 당연히 최고급으로.

     받은 월급은 무기, 탄약이나 화장품 보충 외에는 쓸 데가 없어서 점점 쌓여만 갑니다. 그래서 이럴 때만큼은 과감하게 탕진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련님의 것만이 아니라 제 베개까지 새로 장만할 정도로 저도 들떠있었나 봅니다.

    아아, 하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꺼이 받아줄까요? 도련님에게 강림제 선물을 주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매년 첫사랑의 편지를 쥐고 있는 소녀처럼 긴장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심하다, 초라하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뺨에 닿는 눈마저 녹여버릴 것 같은 불빛을, 기분 좋다고도 느껴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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