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23년 12월 20일 21시 03분 04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작성자: 비오라트728x90
"루티아, 타락한 성녀여. 이제부터 너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그 죄를 처단한다."
건국제 다음날, 젊은 왕 아란의 차가운 목소리가 왕성의 넓은 홀에 울려 퍼졌다.
신검으로 대지를 진정시키는 의식이 무사히 끝난 것을 축하하는 파티는. 왕의 선언에 의해 단죄의 장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일로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했다.
모두들 이 자리에서 왕과 성녀의 정식 결혼이 발표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은발벽안의 소녀이며 하얀 드레스를 입은 성녀 루티아는. 당당하게 서서 왕을 바라보았다. 주눅 들지 않고서.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나이다. 저는 십 년 동안 성심성의껏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신전에서 신룡에게 기도를 드리고, 신검을 받아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걸까요?"
"거짓말 마라! 물론 너는 지금까지 신검을 받아 대지를 진정시켜 왔지. 하지만 그건 작년까지의 이야기다."
"무슨 말씀이신지......."
"올해에 정말로 신검을 받은 자는 마리엘 후작영애라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았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근처에 있던 빨간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의 이름을 부른다.
마리엘은 쏟아지는 시선에 답하듯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리엘이 봉헌한 신검을, 너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진정한 성녀를 욕되게 하고, 신사를 더럽힌 것이다."
"폐하,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아니면, 네가 신검을 받는 장면을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루티아의 말을 가로막고서, 왕은 시험하듯 물었다.
루티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이해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을.
성녀인 루티아는, 매년 백성들과 신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검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올해 의식의 장소는 성전 앞이 아닌 성전 안의 대성당에서 진행되었고, 입회자도 단 한 명뿐이었다.
"증인도 있다. 올해 네 의식을 지켜본 신관은 네가 신검을 받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줄거리였던 것이다. 여기서 루티아가 아무리 주장해도 증인도 증거도 없다.
아무도 없다.
루티아를 지켜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루티아에게는 후견인이 없다.
가난한 북쪽 마을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성녀의 자질이 있다고 판단한 부모에게 팔려가, 왕도 성전에서 십 년을 성녀로 살았다.
굶주림 없는 삶.
신룡의 위대한 힘.
일 년에 한 번, 건국절 의식이 있을 때만 향하는 사람들의 경애의 시선.
그것들을 받자,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기도를 드리고, 성심성의껏 신룡과 나라를 위해 헌신할 생각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면 옛 성녀는 환속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너는 성녀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우리를 속였다. 나와 혼인을 맺을 때까지 성녀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왕은 승리에 도취된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마리엘의 어깨를 안으면서.
마리엘은 왕에게 몸을 기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네가 9년 동안 제사를 지낸 것도 사실. 원래는 화형에 처해야 하지만, 오랜 공적을 감안해 온정을 베풀어 주마. 성의 지하감옥에 유폐시키겠다. 그곳에서 평생 자기의 죄를 반성하라. 변명은 있는가?"
"............"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왕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다. 루티아가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지지해 줄 아군은 없다.
"없는 것 같군. 우둔한 여자로고. 위병들아, 타락한 성녀이자 우리를 속인 마녀를 데려가라."
"성녀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마, 아란."
차분하지만 힘찬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를 들은 왕의 표정이 달라졌다.
"크, 크로비스 사촌형님!"
◆
목소리의 주인공인 검은 머리의 청년은 천천히 걸어 나와 루티아의 뒤에 섰다.
크로비스 왕자는 이웃나라인 황국의 황자이자 아란 왕의 사촌이다. 아란 왕의 어머니는 황국에서 시집왔다. 십 년 동안 신전에 격리되어 있던 루티아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어째서 여기에?"
"뭐야, 섭섭하기는. 우리는 사촌이잖아. 작년에 보여줬던 제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꼭 한번 더 보고 싶었거든. 이모님의 호의로 이 자리에도 참석할 수 있었어."
크로비스 왕자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루티아 앞에 돌아가더니 깊이 인사했다.728x90'연애(판타지) > 성녀로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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