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라트의 번역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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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01월 18일 22시 06분 23초에 업로드 된 글입니다.
    작성자: 비오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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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조 님, 울면서 매달리면 무엇이든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확실히, 저는 지금까지 당신님을 언제나 용서해 왔어요. 당신의 뒷수습을 하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요구되는 대로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어요. 좀 더 일찍 당신과 결별했어야 했어요.



    자신이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항상 자신만 생각하는 당신을, 아직은 어리기 때문이라며 그런 단점을 저에게 드러내는 것도, 제게 마음을 허락하여 어리광부리기 때문이라고, 저도 스스로에게 말하듯 오랫동안 괴로운 핑계를 대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이라는 존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짓눌려 있던 무게가 드디어 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부적이 필요한 어린이의 나이도 아니니까요.



    저라는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께 접근한, 이웃 나라에서 왔다고 말씀하셨던 그 아가씨를 저도 물론 알아보았답니다.

    그녀는 소름끼칠 정도로 미모의 소유자였군요. ...... 당신의 파멸을 예감하게 만들 정도로. 그토록 그녀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아귀에 넘어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에게 빠져드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제 안에서도 그동안 어떻게든 참아왔던 것들이 마침내 둑을 뚫고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왕실 주최의 야회에서, 약혼녀인 저를 제쳐두고 야회에 직접 초대해 준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황태자인 당신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국왕과 왕비님. 그리고 당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아버지와 오빠의 얼굴이, 이런 상태에서도 잊히지 않네요.



    그녀와 춤을 추고 난 후, 아버지와 오빠의 찌르는 듯한 눈빛을 모른 척하며 당신은 급사로부터 와인잔 두 개를 받아 한 잔은 그녀에게 건네고 한 잔은 당신 손에 쥐고 계셨지요. 하지만 그때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분명 저였을 겁니다. 당신의 곁에 바짝 몸을 밀착시키며 볼을 가까이하며 "어머, 무서워라."라며 저를 보고 빙그레 웃는 그녀에게, 당신은 부정도 하지 않고 웃어주며 손에 든 와인잔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지만, 내가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본 당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움직임을 멈추었죠.



    저는 달리기 위해 드레스를 들어 올리던 손을 떼고서, 그 손을 그대로 당신의 손으로 뻗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잔을 가져다 주면서, 저한테는 안 가져다주시는군요?...... 이제 이만 헤어져요. 로렌조 님."



    마치 피처럼 진한 붉은색의 와인이 잔뜩 부어있는 잔을 나는 당신의 손에서 슬쩍 빼내어 그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위 귀족의 아가씨로서 다소 난폭한 행동이었음을 알고 있지만, 저도 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답니다.



    "잠깐, 밀리! 알고 있잖아, 그건 ......"



    오빠의 다급한 외침이 주변에 울려 퍼집니다.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그 사이사이로 무장한 사람들이 튀어나왔습니다.



    당신의 팔에 매달리는 그녀의 표정이 창백해지고, 당신의 등에 몸을 숨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습니다. 당연히 연회장은 난리법석. 그 아가씨는 붙잡히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요, 그 아름다운 아가씨는 이웃 나라에서 당신께 보낸 자객이었답니다. 너무나 쉽게 당신께 접근할 수 있어서, 분명 놀라지 않았을까요?



    당신의 명성만큼은 일류였으니까요.

    ...... 아니, 학력이라는 의미의 두뇌와 신체적 능력, 그리고 그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의 얼굴은 확실히 흠잡을 데가 없었지요.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좀 모자란 면이 많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결점을 고쳐주는 것은 언제나 제 몫이었어요.



    그날, 왕가를 뒤에서 지탱해 온 아버지를 필두로 한 저희 가문의 식구들도 그녀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답니다. 꼬리를 내밀 때 잡기 위해서요.



    우방국 행세를 하며 이 나라의 붕괴를 노리던 이웃 나라들도, 단순한 정보 수집을 위해 파견했을 그녀에게 결국 그토록 큰 역할을 맡기게 될 줄은 처음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에요. ...... 당신께서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에 그녀가 하얀 가루를 조심스럽게 넣었을 때, 그녀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미처 자신을 처리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붙잡힌 거겠죠.



    그런 정체불명의 여인을 야회에 초대했다가 약혼녀가 쓰러졌으니, 당신께서는 왕의 신임을 완전히 잃었겠지요. 제 아버지와 오빠도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을 거예요.



    ...... 하지만, 그런 어리석은 당신이었지만, 저는 당신을, 그래도 지금까지는 진심으로 사랑했었어요.

    그런데도 당신이 저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그 눈빛에 비춰주지 않으니, 저, 이대로라면 저를 이용만 하는 당신이 미워질 것 같았어요. 애정과 증오는 한 끗 차이......라고도 말하니까요. 그런 악마 같은 얼굴로 변한 제 모습을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고, 저 자신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순간, 당신과 작별을 고한 후 그 와인잔의 내용물을 다 마셔버렸어요. 만약 그 자리에서 제가 당신의 손에 있던 와인잔을 떨어뜨렸다면, 당신은 분명 나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그녀를 감싸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겠지요. 그 모습을 지켜볼 마음의 여유가 더 이상 제게 남아 있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당신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든 풀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제가 가장 어리석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먼저 나서서 대응하거나 뒷수습하는 것에만 급급했던 당신은,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이제 와서 그 사실을 깨달아도 이미 늦었어요.



    "아아, 밀리, 제발 부탁이야. 제발, 제발 그 눈을 떠줘. 이런 나를 감싸주기 위해 몸으로 희생하다니. 제발 나를 용서해 줘......"



    아무리 당신의 소원이라도, 당신이 아무리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려도,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용서하는 것도 이번만큼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관 속에 들어갔으니까요.



    설마 백합꽃으로 가득 찬 관에 안치된 제 모습을 하늘에서 바라보게 될 줄은 저도 몰랐네요. 신께서도 이런 모습을 마지막에 보여주시다니, 마지막 서비스를 해주신 것 같네요.



    당신은 이제 외통수예요. 항상 당신의 뒷수습을 하던 저는 이제 울어도 외쳐도 돌아올 수 없습니다. 당신의 폐적은 이미 결정된 것 같고, 요직에 있는 공작가의 아버지와 오빠는 당신이 폐적한 뒤에도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지요. 저는 지금껏 당신께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오빠에게는 큰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만 안심하셔도 돼요.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귀신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당신의 진심 어린 회한의 눈물을 볼 수 있어서,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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