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향 게임 [은의 성녀와 다섯 개의 맹세]에는 [공략대상자 타락 이벤트]가 존재한다.
이 게임에서는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라스트 보스인 마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여러 명의 중간보스라 불리는 캐릭터가 적으로 등장한다는 설정이다.
루시아나 루틀버그는 게임 내 첫 번째 중간 보스인 '질투의 마녀'이지만, 현실에서는 동급생인 루나 인비데아가 그 역할을 맡게 된 사연이 있다.
그리고 이 게임에는 '공략 대상자 암흑 타락 이벤트'라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즉, 세실리아에 대한 질투심을 이용해 질투의 마녀가 된 루시아나처럼, 다섯 명의 공략 대상자 역시 정신적인 약점을 공략당한 결과, 중간보스로 변해가는 전개가 준비되어 있다.
다섯 명 중 가장 먼저 중간보스가 되는 것은 크리스토퍼다.
계기는 1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다섯 번째 공략 대상자인 슈레딘에게 전교 1등 자리를 빼앗긴 것에서 타락 이벤트가 시작된다.
다섯 명의 공략 대상자들은 각자 마음속에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게임에서는 세실리아가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고 호감도를 쌓아가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마왕은 그 고민의 틈새를 파고들어 공략 대상자를 장악하려는 계략을 세운다.
"크리스토퍼의 고민은...."
"왕태자라는 지위에 대한 부담감이지.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
게임 속 크리스토퍼는 갓 성인이 된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 왜 그렇게 빨리 왕태자가 될 수 있었냐 하면 그가 뛰어난 것도 분명 이유 중 하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왕가의 직계 혈족이 국왕 말고는 크리스토퍼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몇 대 동안 왕실은 후계자가 한 명밖에 태어나지 않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현 국왕도, 선왕도, 선대 국왕도 모두 외동아들이었다. 모두 왕비와 사이좋게 지내며 측실을 거부한 결과다. 연애적인 의미로는 성실하고 멋진 이야기지만,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후계자가 한 명밖에 없는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현 국왕을 포함해 왕태자의 책봉 시기가 매우 빨랐다. 확고한 위치에서 공적인 일에 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후계자 후보가 없는 이상 왕태자라는 확실한 직함이 있는 것이 주변에서도 받아들이기 쉽다. 약혼녀도 어릴 때부터 정해졌고, 운이 좋았는지 현 국왕 대까지는 왕태자를 훌륭하게 받쳐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 현 국왕 대까지는 .......
안네마리 빅틸리움 후작영애.
여성향 게임 '은빛 성녀와 다섯 개의 맹세'의 히로인의 라이벌이자 악역영애. 성격은 성질이 급하고 제멋대로이며, 학업에 대한 열정은 적고, 미모가 어떤가 하면 약혼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고 마는 소녀.
그런 인물이 크리스토퍼를 지탱해 주는 존재가 될 리 만무했다.
왕태자가 된 이상 왕립학교에서의 성적이나 학생회 활동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되고, 당연히 왕태자가 공적인 일에 실패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서 열다섯 살 소년의 정신은 항상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주변에 알리지 않는 연기력이 오랜 왕자의 생활 속에서 올라간 바람에 그의 중압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맥스웰조차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 국왕도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 앞에서만 안도의 한숨 놓을 수 있었다. 왕태자가 되기까지 좋은 관계를 맺은 덕분에, 현 국왕은 왕태자라는 중압감을 약혼녀와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는?
자신밖에 모르는 안네마리와 짐을 나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마음에 불만이 쌓여간다.
계속되는 왕태자 연기에 대한 피로, 지탱은커녕 뒷수습까지 해줘야 하는 약혼녀, 그리고 입학식 이후 간간이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사건들. 크리스토퍼의 앞에는 난제들이 쌓여가고, 마침내 유학생 슈레딘에 의해 그의 아성이 하나 무너져 버린다.
2학기 중간고사 시험에서 전교 1등 자리를 순식간에 빼앗겨버린 것이다.